'요령연화보유적'은 중국 요령성 무순시 연화보에 있는 철기시대 집터 및 토기 · 철기 · 화폐 등이 발굴된 유물산포지이다. 우리나라 철기 문화의 개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으로, 1959년 라이닝성박물관에서 고고학 조사를 하던 중 최초로 발견되었다. 고조선 문화를 바탕으로 전국시대 연나라의 문화가 혼입되는 양상이 '위원용연동유적'과도 동일하며, 이 지역의 물질 문화를 묶어서 '세죽리-연화보 유형'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만 그 조영 주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존재한다.
'요령연화보유적(遼寧蓮花堡遺蹟)'은 중국 요령성 무순시 장당향 연화보촌의 혼하(渾河) 남쪽 기슭에 형성된 대지 위에 조영되었다. 서북쪽의 장당역으로부터 8㎞ 정도 떨어진 지점이다. 유적 주변을 흐르는 동사하(東社河)는 마을의 서북쪽을 지나 혼하천(渾河川)으로 합류한다.
유적의 위치는 연화보 마을 동쪽에서 가까운 대지인데, 지금은 수몰된 상태이다. 원래 유적의 면적은 동서가 약 150m이고 남북이 약 100m 정도의 범위로 대규모이다. 이 유적은 1956년 봄 랴오닝성[遼寧省]박물관에서 고고학 조사를 하면서 발견되었다가 같은 해 가을에 다시 재조사가 실시되었다. 모두 8개의 구역을 탐색하여 석축단 터 1개소, 아궁이 2개소, 도랑 1개소, 재구덩이 1개소를 발굴하였다.
유적지 문화층의 퇴적 상황은 대체로 동일하고, 후대의 교란 징후는 특별히 관찰되지 않았다. 층위는 매우 단순하여 경작층과 문화층, 그 아래는 생토층으로 구분된다.
경작층의 두께는 1830㎝인데 여기서 쇠도끼와 토기 남은 조각들이 출토되었다. 경작층 아래는 두께 20126㎝의 문화층이 형성되었는데, 북쪽은 얕고 남쪽으로 가면서 두터운 층을 형성한다. 이 문화층의 흙색은 대체로 회흑색으로 생산 시설의 부산물로 추정되는 다량의 구운흙덩이와 숯이 발견되었다.
또한 문화층에서는 다량의 철기류도 출토되었다. 괭이, 도끼, 호미, 낫, 반달칼, 칼, 송곳, 족집게, 송곳추, 낚시바늘 등이 확인된다. 석기류도 많은데 돌도끼, 돌칼, 연마기(研磨器), 그물추 등이 특징적이다.
청동기도 출토되었는데 검코와 날개가 셋 달린 화살촉이다. 그리고 토기류가 많은데 솥모양토기, 독모양토기, 깊은바리모양토기, 항아리모양토기, 바리모양토기, 굽다리접시, 짧은목항아리 등의 토기 모양이 특징적이다.
이 외에도 석제구슬과 유리구슬 종류도 출토되었는데, 유리제 이당(耳璫)이 주목된다. 이들과 동반되어 서기전 2세기경에 주조된 반량전(半兩錢)이 출토되었다. 이는 '요령연화보유적'의 형성 연대를 시사하는 중요한 출토품이다.
유구로는 돌로 쌓은 벽 시설이 발견되었다. 가로 1m, 세로 0.25m가 남아 있는 상태였는데, 그 기초는 원을 그리는 형태였다. 산돌과 강돌을 양쪽에서 교차시켜 쌓은 것인데 보고자는 담장 시설의 일부로 판단하였다. 원래 원형의 주거지에 돌과 강자갈을 이용하여 흙담을 쌓은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 주거지 안팎에서는 산화염 소성의 민무늬토기와 니질계 회도 파편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철기는 20여 점이 출토되었다. 쇠도끼와 낫, 그리고 호미, 반달칼 등이다. 수혈(竪穴) 구덩이와 도랑도 발견되었는데, 내부에서 많은 토기류와 주조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회도와 쇠도끼, 그리고 청동 화살촉도 이러한 구덩이에서 발견되었다.
유적에서 출토된 철기류는 그 형태가 다양한데 주조 쇠도끼가 60여 점으로 가장 많다. 이들 쇠도끼는 공부에 2조의 돌대가 있는 것과 단합범 철부 등이 있는데, 모두 전국시대 연나라에서 생산되던 철기류와 같은 계통이다. 철낫과 호미 등의 철기류도 마찬가지인데, 다만 반달칼은 연나라의 철기가 아니라는 평가를 받는다.
토기들은 만여 점이 넘는 파편이 출토되었는데 완성된 모양으로 복원되는 것은 적었다. 이들은 석사립이 혼입된 산화염 민무늬토기들과 니질계의 회도류로 구분되는데, 전자가 2/3 정도의 비율로 많다. 특히 고조선의 기층토기 문화라고 할 수 있는 덧띠토기와 굽다리접시가 많다.
또 활석가루를 비짐[첨가재]으로 섞어 넣은 토기류도 제법 많은데, 이는 연나라 토기의 특징이다. 솥모양토기는 연나라의 대표적인 취사 토기인데 연화보에서는 활석 대신 석사립이 다량으로 혼입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지역색이 강하게 발현된 것이다.
독모양토기는 구연 아래에 주름문이 있고 다량의 활석이 혼입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연나라 토기와 유사성이 높다. 깊은바리모양토기들은 모두 니질계의 회도인데 전국시대와 전한대(前漢代)로 비정할 수 있는 토기들이다.
이들 토기들은 요동반도 남쪽 기슭의 목양성과 고려채, 그리고 연변 세죽리에서 출토된 토기들과 강한 유사성을 띤다. 여기에 철기류와 청동기들의 조합상도 유사하여 이를 '세죽리-연화보 유형'이라고 묶어서 살피는 경우도 있다.
'요령연화보유적'의 학술적 의의는 우선 다량의 주조제 철기의 존재에 있다. 이는 요동 지역에서 고조선 후기, 즉 중국의 전국시대와 서한 시기에 제철 작업이 활발했음을 의미한다.
토기 등의 내용도 전국시대와 서한 시기의 연나라 문화와 통하는 부분이 있어 중국 학계에서는 이를 중국 중원 문화의 확산이라는 차원에서, 나아가서는 전국시대 연과 진한 제국의 영역 지배의 결과라고 판단한다. 일본 고고학계에서도 이에 동조하는 연구자들이 있다.
반면, 대한민국 학계에서는 '세죽리-연화보 유형'의 조영 주체가 고조선 세력에 있다고 보는 연구자가 많다. '세죽리-연화보 유형'이 분포하는 지역에서 출토되는 주조 철기가 연나라의 것과 다른 요소가 있다는 것이 이유이다.
나아가 토기 조합도 연나라 토기 문화 그 자체가 아니라 지역화가 크게 진행된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 지역에서 많이 발견되는 명도전(明刀錢)의 사용 주체를 고조선 세력이라고 보는 시선과도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