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목은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전(水軍第一偉人 李舜臣傳)’이다.
1908년 5월 2일부터 8월 18일까지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뒤 한문을 모르는 일반 민중과 부녀층을 계몽하기 위하여 순국문판 「리슌신젼」을 1908년 6월 11일부터 10월 24일까지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하였다.
이 작품은 단재(丹齋) 신채호가 국민들에게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심을 배양하려는 목적으로 1907년 10월 번역한 양계초(梁啓超)의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을 필두로, 한국 역사상의 삼걸(三傑)인 을지문덕(乙支文德)·최영(崔瑩)·이순신(李舜臣)을 뽑아 저술한 소설이다.
판본으로는 아세아문화사 영인본인 『역사·전기소설(전10권)』과 단재신채호기념사업회에서 간행한 『단재신채호전집(전4권)』인 국한문본이 있다.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대장이 되어 전쟁놀이를 즐겼다. 그는 22세 때부터 본격적인 무예 훈련에 몰입하여 28세에 훈련원 별과에 응시했으나 실패하여 다시 32세에 식년무과(式年武科)에 정식으로 합격한다.
다시 35세에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에 부임한 이래 문란한 군기를 바로 잡으려고 노력했으며 힘있는 사람에게 의지하여 출세를 도모하지 않는다.
오직 정의와 성실밖에 모르는 그에게 심한 모략과 중상이 늘 뒤따른다. 39세에 함경북도 경원군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으로 전임되어 변방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기계(奇計)로 처치한 공적을 병사(兵使) 김우서(金禹瑞)가 시기하여 허위 보고서를 올려 논공이 중지되어 정기 승급에서 겨우 일계급 승진했을 뿐이다.
직속 상관인 병사 이일(李鎰)이 이순신의 녹둔도(鹿屯島)증원군 요청을 묵살한 잘못과 그로 인해 생긴 피해에 대한 책임이 자기에게 돌아올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심한 형벌을 가하여 입을 막으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무고(誣告)하여 관직을 삭탈하고 백의종군(白衣從軍)케 한다.
당쟁으로 인한 모략과 승진이 지연되다가 임진왜란을 앞두고 47세에 전라 좌수사에 임명된다. 이 때 왜군의 침입에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는 조선과는 달리 일본의 풍신수길(風臣秀吉)은 무력을 강화하고 대대적인 침공 준비를 한다. 그런데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은 각종 총통 제작과 전선의 제조 및 거북선을 재정비하여 전비(戰備)를 강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인다.
드디어 1592년 왜구가 부산을 함락하자 이순신은 단독으로 겨우 85척의 병선을 거느리고 부산으로 향한다. 그리하여 1차 출전인 옥포(玉浦)해전과 2차 출전인 당포(唐浦)해전, 그리고 3차 출전인 견내량(見乃梁)싸움에서 큰 전과를 거둔다.
견내량 해전에서 왜군들은 이순신의 위용에 눌려 평양까지 진출한 소서행장(小西行長)도 남하할 운명에 놓인다. 4차 출전인 부산포해전에서도 왜선 100여 척을 격파하는 연속적인 대승리를 거둔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조정에서도 수군의 중요성과 아울러 수군만을 통수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지휘관이 필요하자 이순신을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3도 수군을 통제하는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한다. 그리하여 민주적으로 수군의 지휘권을 행사하며, 군민 합작으로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창의적으로 군비를 강하하여 왜군의 동정을 관찰한다.
이순신이 통제사로 있는 동안에 원균의 시기와 음모가 깊어지면서 위급하고 중요한 전투에서도 군령을 위반한다. 원균의 행동을 단시일에 해결할 수 없어 군내가 뒤숭숭하자 자신의 직책을 교체하여 주기를 원했으나, 충청 병사로 전직된 원균이 당시의 당색을 이용하여 모해 공작을 전개한다.
이때 조선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코니시와 카토오 등이 조정의 당쟁과 이순신과 원균의 관계를 이용하여 이순신을 제거하든가, 이순신의 함대를 유인하여 복병한 군사를 이용해 기습하려던 간계는 원균을 비롯한 서인 일당들에게 좋은 자료가 되어 이순신을 중상 모략하여 입옥시킨다.
그러나 정탁(鄭琢)의 구명진정서에 의해서 이순신이 두 번째의 백의종군의 고행을 겪고 있을 동안, 원균은 개인적인 향락을 위한 권력의 남용으로 군기를 극도로 문란시켜서 왜군의 침입을 막을 수 없는 위기로 몰아넣는다. 수군의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 침공한 왜적을 원균이 억지로 200여 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한산도에 출항했으나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한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폐허 속에서 수군을 재건하여 전선 12척으로 왜선 133척 중 31척을 격파한 명량대전의 공을 세운다. 왜군은 명량해전의 참패로 육상과 해상의 진출을 단념하고 다시 남해안으로 집결한다. 이 때 막내아들 이면(李葂)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지만 사사로운 슬픔을 자제하는 면모를 보인다.
또한 난폭한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도 이순신의 관대한 아량과 준엄한 태도에 감복하여 연합함대를 편성해 해상에 출현하는 왜선을 격파할 때 풍신수길이 사망하자 왜군들은 철군할 계획을 세운다.
명나라 원군이 도착했으나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하지 않고, 오히려 코니시는 뇌물로써 명장들을 매수하여 퇴로를 모색했으나 이순신에 의해서 좌절되곤 한다. 그리고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200여 척의 왜선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웠으나 적탄에 맞아 숨을 거둔다. 이리하여 7년 간에 걸친 전란은 이순신의 전사와 함께 막을 내린다.
「이순신전」은 다른 역사전기소설과 마찬가지로 동양의 전통적인 전기형식인 ‘전(傳)’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전’은 일반적으로 도입, 전개, 종결이라는 내용상의 단계가 구분되고 있는 것이 보통인데, 「이순신전」도 앞뒤에 저술 의도를 밝힌 서론과 작자의 논평을 담은 결론, 그리고 전개부분을 크게 확대해서 그 내용을 다시 세분하는 소항목의 회장(回章)체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논설형식과 유사한 것으로 전통적인 ‘전’에는 없는 목차와 소제목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물에 관한 스토리 전개보다는 영웅을 통해 현재의 당면 과제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주제를 명백히 드러내 민중에게 즉각적인 이해를 도모하려는 것으로, 일제 침략의 위기에서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한편, 사실상의 역사 상황을 함께 제시하려는 작자의 긴박한 시대인식과 관계된다.
따라서 당대의 직접적인 침략국인 일본과의 대항이라는 역사적 소재를 통해서 현실 저항의 우의(寓意, 알레고리)를 실현하고자 함이다. 이것은 국가 존망의 위기 속에서도 국난 극복의 주역인 제2의 이순신이 출현하여 국위를 선양해 줄 것을 갈망한 것이며, 위대한 영웅의 탄생은 절망적인 국가의 운명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암시하려는 의도이다.
그런데 영웅의 탄생과 시련의 극복, 죽음의 서사구조인 이순신의 일생이 영광으로만 빛난 것이 아니라 박해로 인한 실의와 좌절에 빠지기도 한다. 이것은 이순신이 탁월한 인성과 지력과 능력을 소유한 도덕적 인물이지만 그 보상을 현실적으로 받지 못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비도덕적인 세계의 힘이 너무나 완강하여 패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의 서술에 초점을 둔 역사전기소설의 특징 때문이다.
그러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의 의지와 행동을 촉구하는 영웅적 의지에 주제의식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소설로서의 한계성이 노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대소설의 영웅군담소설과는 달리 역사전기소설의 영웅이 맞이하는 비극적 운명은 다음에 오는 불행한 결말의 신소설의 생성과 그 서사적 사실성에 기여하는 점에서 문학사적인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