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조구산지 설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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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비문학
작품
조선 태조의 선조 묘지에 관련된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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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태조의 선조 묘지에 관련된 설화.
내용

신이담(神異譚) 중 풍수담(風水譚)에 속하는 설화 유형의 하나이다.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및 작자 미상의 『자경지함흥일기(慈慶志咸興日記)』 등에 실려 전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태조가 미시(微時)에 함흥에서 친상을 당하였으나 좋은 지관을 만나지 못하여 아직 산지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종아이가 나무를 하러 산으로 갔다가 길에 앉아 쉬던 스님과 상좌를 만났는데, 그 중 스님이 “저기 아래 것은 장상(將相)이 날 자리에 불과하나 위의 것은 당세에 왕후(王侯)가 날 자리라.”라고 하는 말을 엿들었다.

종아이가 빨리 달려가 태조에게 고하니, 태조는 즉시 말을 달려 10여 리를 쫓아갔다. 이윽고 두 사람을 만난 태조는 말에서 내려 공손히 절하고 자신의 집으로 가기를 요청하였다. 처음에는 사양하던 두 사람도 태조의 거듭된 간청에는 어쩔 수 없어 마침내 동행을 허락하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두 사람을 자신의 집으로 모신 태조는 정성을 다하여 융숭히 대접한 뒤 친상을 당한 자신의 처지를 말하고 산지를 보아 줄 것을 청원하였다.

스님은 “구름같이 떠돌아다니는 중이 무슨 산술(山術)을 알겠습니까?” 하고 거절하였으나, 상좌가 “남의 성의를 차마 저버릴 수 없으니, 저번 그 자리를 가리켜 주면 좋겠습니다.”고 권유하여, 결국 스님도 왕후의 혈을 일러 주고 가 버렸다.

그곳이 환조(桓祖)의 능침인 정화릉 터였으며, 스님은 나옹(懶翁), 상좌는 무학(無學)이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이성계의 조선조 건국을 합리화하려는 목적의식에서 꾸며 낸 이야기일 것으로 추측된다. 풍수설을 빌려 조선조의 건국이 결코 우연이 아닌 천명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 있는 일은 『오산설림초고』보다 약 반세기 앞선 중국 명나라의 왕문록(王文錄)의 『용흥자기(龍興慈記)』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인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의 선조 묘지에 얽힌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 민간에서는 이태조의 부친과 명태조의 부친이 함께 백두산에서 묘지를 구하였다든가, 또는 조선 출신인 주원장과 이성계가 각각 중국을 치러 나가다가 한 주막에서 만나 같이 술을 마셨다는 전설들이 전하는 것을 보면, 위 두 책에 수록되어 있는 설화의 유사성에 무슨 곡절이 있을 듯하다.

사실로써 살핀다면 중국 남방 출신인 주원장과 함경도 출신인 이성계가 함께 술을 먹었을 리 없으며, 더구나 두 사람의 부친이 함께 묘지를 찾았을 리도 없다.

이는 아마도 일찍이 손진태(孫晋泰)가 설파하였듯이 금태조나 청태조가 모두 조선계였으며, 이성계와 주원장이 똑같이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서 거의 동시에 국가를 창건하였다는 점에서 유추하여, 자연히 이태조와 명태조를 함께 놓고 보려는 의식에서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두 기록의 유사성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겠지만, 위와 같은 속신에서 비롯된 모방의 결과일 수도 있다.

참고문헌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자경지함흥일기(慈慶志咸興日記)』
『조선민족설화의 연구』(손진태, 을유문화사,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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