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이하 왕 · 문무백관이 착용하였던 제복(祭服)의 한 종류이다. 황제나 왕은 대례(大禮) 제복으로 면류관(冕旒冠)에 곤복(袞服)을 입었는데, 곤복에 장식한 문양의 수(數)에 따라 품급(品級)이 다른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에서 장복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 말이다.
왕 이하 백관에 이르기까지 면류관에 장복을 제복으로써 착용하였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1140년(인종 18) 송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처음으로 면류관에 장복을 제복으로 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의종 때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에 따르면 왕은 9장복, 그 이하 신하들은 품위(品位)에 따라 7장복 ·5장복 ·3장복 ·1장복 · 무장복 등을 제복으로 사용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공민왕은 자주적 입장을 취하여 12장복을 착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서서는 명나라로부터 전하여진 9장복을 왕이 입었으며, 명나라가 망한 이후에도 계속 9장복을 착용하다가 대한제국이 성립된 이후 12장복의 제도를 정하였다. 한편, 문무백관은 고려말과는 달리 제복으로 장복을 택하지 않았다.
12장복에는 일(日) · 월(月) · 성신(星辰) · 산(山) · 용(龍) · 화충(華蟲) · 종이(宗彛) · 조(藻) · 화(火) · 분미(粉米) · 보(黼) · 불(黻)을 장식하였다. 의(衣)에는 앞자락 어깨에 일 · 월을, 등뒤에 성신 · 산을, 양소매의 바깥쪽에 용 하나, 화충 셋을 각각 그린다. 상(裳)에는 화 · 종이 · 조 · 분미 · 보 · 불을 4행으로 배치하는데, 화 · 종이 · 조를 2행으로, 분미 · 보 · 불을 2행으로 하였다.
중단(中單)에는 13개의 불문을, 폐슬(蔽膝)에는 용 하나, 화 셋을 배치하였다. 왕의 9장복에는 의의 양어깨에 용, 등뒤에 산, 양소매에 화 · 화충 · 종이를 각 셋씩, 중단에는 불문 11개를 그렸다. 폐슬과 상에는 조 · 분미 · 보 · 불을 각 2행씩 수놓았다. 7장복에는 의에 화충 · 화 · 종이의 3장문을 그리고, 상에는 조 · 분미 · 보 · 불을 수놓았다.
5장복에는 종이 · 조 · 분미를 의에 그리고, 상에는 보 · 불을 수놓았다. 3장복에는 의에 조 · 분미의 2장문을 그리고, 상에 불문을 수놓았다. 1장복에는 상에 불문만을 수놓았으며, 무장복(無章服)에는 장문이 없다. 이러한 장문은 의에는 그려서(繪), 상이나 폐슬에는 수(繡)를 놓아 표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