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경궁(儲慶宮)은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3가에 있던 선조의 후궁이자 원종의 사친이었던 인빈김씨의 궁묘이다. 본래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부친인 원종의 제택(第宅)으로 인조 즉위 후 송현궁(松峴宮)이 되었다. 1755년(영조 31) 6월에 원종의 사친인 인빈김씨에게 ‘저경’이라는 궁호를 바친 후 제향을 위한 묘우(廟宇)를 짓고는 저경궁으로 불렀다. 인빈김씨를 위한 제사궁 기능을 하던 저경궁은 1908년(융희 2)에 육상궁(毓祥宮)에 합쳐지고 그 소유지는 국유지가 되었다.
저경궁(儲慶宮)은 본래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부친인 원종의 제택(第宅)으로 인조 즉위 후 송현궁(松峴宮)이 되었다. 1755년(영조 31) 6월에 원종의 사친(私親)인 인빈김씨(仁嬪金氏)에게 ‘저경’이라는 궁호를 바친 후 제향을 위한 묘우(廟宇)를 짓고는 저경궁으로 불렀다.
저경궁의 자리에 있었던 송현궁은 선조와 후궁 인빈김씨 사이에 태어난 정원군(定遠君)의 제택이었다. 정원군은 아들 능양군(綾陽君)이 반정으로 왕이 되면서 1633년(인조 10)에 추존(追尊)되어 원종(元宗)이 되었다.
송현궁에는 정원군 사후에 그의 자손들이 살면서 정원군 부부와 후궁인 인빈김씨의 신위를 모시고 있었다. 1633년 정원군이 추존되어 왕이 되자 그 신위는 종묘에 부묘(祔廟)되었고, 정원군의 친어머니였던 인빈김씨 또한 왕을 낳은 것으로 되어 그 신위를 영구히 보존하게 되었다. 즉 송현궁에는 인빈김씨의 신위만 남게 된 것이다.
1743년(영조 19) 인빈김씨의 사우(祠宇)는 여천군(驪川君) 이증(李增)의 집으로 옮겨져 의창군(義昌君) · 낙선군(樂善君)과 같은 사당에 함께 봉안되었다.
그러나 1749년(영조 25) 이증이 역적의 죄명으로 제주에 정배(定配)되자, 1755년(영조 31)에 인빈김씨의 신위를 다시 송현궁으로 옮겼다. 그리고 인빈김씨에게 ‘경혜유덕(敬惠裕德)’이란 이름을 더하고 저경(儲慶)이란 궁호를 내렸다. 이때부터 송현궁은 저경궁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인빈김씨를 제향하는 제사궁이 되었다.
1908년(융희 2)에는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 연호궁 등과 더불어 위패를 육상궁(毓祥宮)으로 옮겨 봉안했고 그 소유의 땅은 국유지가 되었다.
저경궁의 위치는 19세기 중엽의 지도인 「 조선경성도(朝鮮京城圖)」에, 종로에서 남대문으로 향하는 남대문로 우측 편 길에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조선시대 호현방(好賢坊),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일대이다.
1927년까지 건물이 남아 있다가, 그 자리에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의 전신〕를 건축하면서 철거되었다. 철거 때 궁의 정문과 하마비(下馬碑)는 조선은행〔한국은행의 전신〕 뒤뜰에 보존하였으나, 1933년 정문을 철거하면서 하마비는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옮겨 보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