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래는 일본 도쿄부립[東京府立] 제4중학교를 거쳐 1943년 도쿄의 아테네 프랑세에서 수학하다가 1944년 12월에 중퇴한 뒤 귀국하였다. 소년 시절 철봉을 하다가 척추를 다쳐 평생 건강이 부실하였는데, 불편한 몸으로 육군 종군작가단에 참가하여 서부 전선에서 종군하였고 「전선(戰線) 스냅」을 창작하였다.
한국전쟁 때 피난지 부산의 어느 다방에서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하였고, “찬란한 이 세기에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소. 그러나 다만 정확하고 청백하게 살기 위하여 미소로써 죽음을 맞으리다. 바흐의 음악이 흐르고 있소.”라는 짤막한 유서를 남겼다. 이 유서와 함께 그의 자살은 당시 피난문인들에게 적지 않은 실존적 충격을 주었다.
전봉래는 프랑스의 상징주의 문학을 전공하여 그 계통의 작품을 총 4편 번역하였다. 대표적으로 발레리(Paul Valéry)의 「일어진 술」(『평화일보』, 1948.2.26.), 베를렌(Paul-Marie Verlaine)의 「뇌옥에서」(『평화일보』, 1948.3.23.) 등이 있는데 대부분의 원고는 한국전쟁 중에 산일되었다. 그중 원저자를 알 수 없는 「창조와 혼돈」(『시문학』 제3집, 1951.6.)은 전봉래가 죽기 전날 김종문이 건네받은 번역 원고였다.
창작시는 약 20편을 썼을 뿐인데, 1950년 1월 31일부터 『연합신문』에 마련된 「신설시선(新說詩選)」란에 시 2편을 발표했다는 점에서 전봉래의 시적 재능은 한국전쟁 전에 이미 문단 일각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950년 전봉건이 『문예(文藝)』지에 시 「원(願)」을 처음으로 추천받았을 때 편집자가 그의 작품일 것이라고 짐작하여 그의 이름으로 발표한 일이 있다. 한편 전봉건이 소장했다고 알려진 종군문학 「전선(戰線) 스냅」은 전투 현장을 형상화하는 가운데 반공 이념보다 인간성의 상실과 전망의 부재에 대한 절망과 비애가 전경화되고 있다. 또한 전봉래는 고전음악에 대한 조예도 깊어 음악감상을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