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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인물
개항기 뮈텔 주교에 의하여 서품을 받고 47년간 횡성의 풍수원본당에서 사목한 사제. 신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63년(철종 14)
사망 연도
1943년
출생지
충청남도 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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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개항기 뮈텔 주교에 의하여 서품을 받고 47년간 횡성의 풍수원본당에서 사목한 사제. 신부.
내용

충청남도 아산 출생. 천주교 신자인 기화(基化)의 3남매 중 장남이다. 병인박해로 온 가족이 피신생활을 하다가 그가 15세 무렵 충청북도 충주 부근의 소탱이에 정착하였다.

그 뒤 블랑(Blanc,J.M.G., 白圭三) 주교에 의하여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명동성당의 글방에서 공부한 뒤, 한기근(韓基根) 등과 함께 신부가 되기 위하여 1884년 말레이시아의 페낭신학교에 유학하였다.

그러나 기후와 풍토를 이기지 못하고 1891년 귀국하여 새로 설립된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지금의 가톨릭대학 신학부의 전신)에 입학하였다. 1896년뮈텔(Mutel,G.C.M., 閔德孝) 주교에 의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신부가 된 뒤 죽을 때까지 47년간을 강원도 횡성의 풍수원본당(豐水院本堂)에서만 활동하였다.

풍수원본당은 강원도 최초의 성당으로, 1866년 병인양요, 1871년의 신미양요로 정부의 천주교 탄압이 극심해지자, 사방에서 피신하여 모여든 천주교 신자들이 형성한 마을에 터를 둔 유서 깊은 성당이었다. 따라서 이곳의 신자들은 화전이나 옹기생산으로 생계를 유지하였으나, 신앙의 열기는 대단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천주교 신부들 중 드물게 의병에 지원하고, 일제의 침략기에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인물들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가 풍수원본당에 부임하였을 때는 동학혁명의 실패, 민비시해사건, 아관파천 등으로 전국에 의병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오지인 풍수원에도 의병들이 피신해 오기도 하였다. 이 때 신자들과 함께 이들에게 침식을 제공하는 등 적극 후원하였다. 그 결과 풍수원본당의 신자들 상당수가 의병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1910년 일제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되자 본당 사랑방에 삼위학교(三爲學校)를 개설하고 논산에서 선생을 초빙하여 학생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게 하고 ≪월남망국사 越南亡國史≫를 보급하여 읽게 하는 등 민족의식의 고취에도 노력하였다.

당시 뮈텔 주교가 일선 신부들에게 선교우선정책·정교분리원칙을 지침으로 내려보내던 상황을 감안할 때 그의 노력은 더욱 돋보인다고 하겠다. 1942년 노환으로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이듬해 사망, 풍수원본당 뒷산 성직자묘지에 묻혔다.

참고문헌

「근대한국사회와 프랑스 선교사의 역할」(차기진, 『교회와 역사』 160, 한국교회사연구소, 198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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