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는 각 역에 역별감(驛別監)이 배치되어 역의 사무를 관장하였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들어 몽고의 침입과 홍건적과 왜구의 창궐로 노정(路程)과 역참(驛站)이 파훼되어 그 운영이 마비가 되자 이를 다시 복구하기 위하여 임시로 정역별감을 파견하였다.
따라서 쇠잔한 정역을 회복시키는 임무를 맡은 별감이라 하여, 정역소복별감(程驛蘇復別監)이라고도 하는데, 1272년(원종 13) 정월에 각 도에 나누어 정역소복별감을 보낸 기록이 보인다.
1389년(공양왕 1년) 12월조준(趙浚) 등이 상소하기를, 근래에 역호(驛戶)가 시들거나 폐지되어 말을 배치해두고 체신을 전하고 길을 알고 가리켜주는 역할을 주군(州郡)이 대신하게 되어 고통이 커서 유망하는 사례가 많음을 지적하면서 주군을 정상적으로 운영케 하기 위해서는 먼저 역을 구휼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국가에서 정역별감을 두어 제역을 안집시키게 하였으나, 1인으로는 능히 관장할 수 없었으므로 사사로이 예속된 사람을 두어 귀와 눈의 역할을 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도당(都堂)에 보낸 것이 아니므로 사람들이 업신여겨 역의 안집이 어려웠다.
따라서 역마다 수령(守令)의 예와 같이 천거하여 5·6품의 역승(驛丞)을 두어 역호와 역마를 충실하게 하여 역제를 정비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조선 초기에 들어서 역승과 정역찰방(程驛察訪)이 함께 설치되었다. 정역찰방은 1402년(태종 2)경기지방의 역로를 살피기 위해 파견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