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은 백제 또는 고려시대부터 불리운 향악곡 중 하나로 <정읍사(井邑詞)>를 노래하던 곡이다. 고려시대부터 왕실에서 <무고(舞鼓)>를 출 때의 반주음악으로 쓰였다. 조선 성종 때 편찬된 『악학궤범』에 그 노랫말이 전하고 무고를 출 때, 절차에 따라 노래하는 내용이 전한다. 조선 후기 무렵 노랫말을 부르지 않는 기악곡으로 바뀌었고, 오늘날 <수제천(壽齊天)>이라는 곡명으로 전승되고 있다. 『악학궤범』에 <무고>를 출 때에 여러 기녀(妓女)들이 <정읍사>를 부르는 노랫말이 전한다. <정읍>은 궁중음악의 백미로 꼽히는 곡이다.
<정읍>은 『고려사』「악지」 삼국속악(三國俗樂) 중 주1으로 소개되어 있으며, 또한 같은 책 고려 속악 중 무고정재 음악으로 쓰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악학궤범』에도 <무고> 정재의 반주음악으로 쓰인 <정읍>이 기록되어 있는데, 다른 문헌에서는 볼 수 없는 <정읍사(井邑詞)>의 노랫말이 전한다. 또한 연주의 빠르기에 따라 ‘만기-중기-급기’로 구별되어 있어서 음악에 변화를 주어 연주했던 관행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정읍사>는 <무고> 정재에만 쓰였던 음악이었으므로 무고정재는 <정읍사> 전승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즉, <정읍사>와 <무고> 정재는 일종의 결합적 관계를 이루었던 셈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정읍사>를 노래하지 않고 기악곡으로 연주되면서 <정읍>은 더 이상 무고정재와의 긴밀한 관계가 유지되지 못하였다.
본래 <정읍사>를 노래하던 <정읍>은 조선 후기 무렵에 기악곡으로 바뀌었고, 가사를 잃은 형태의 모습이 『 대악후보』라고 하는 고악보에 전한다. 『대악후보(大樂後譜)』 권7에 < 동동>과 <정읍> 악보가 연속해서 전하고, 두 곡의 여음이 동일하다고 기록이 있어 <정읍>과 <동동> 두 곡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조선 후기 무렵에 기악곡으로 변하면서 오늘날과 같이 선율을 중심으로 한 장(章)의 구분이 생겼다. 정의 구분뿐 아니라 전승 과정에서 선율과 리듬, 장단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예전 고악보와 현재 연주되는 선율에 차이가 많이 있다. 또한 오늘날에는 삼현육각의 형태로 연주되고 있으나, 조선조에는 관현합주 형태로 연주되었다.
현재 전승되는 정읍(수제천)은 4장으로 되어 있다. 1·2·3장은 6장단, 4장은 2장단이다. 2장은 1장의 반복이고, 3장은 1장과 2장보다 4도 위로 조 옮김하였으며, 4장은 원래의 조로 되돌아간 가락이다. 1·2·3장의 마지막 장단에는 피리가 쉴 때 대금·소금·해금·아쟁 등이 가락을 이어 주는 연음(連音)이 있다. 불규칙 장단으로 되어 있으며 선율은 주2가 중심을 이룬다. 1, 2장의 선율은 남려계면조가 뚜렷한 데 비해 3장 이후는 남려계면조와는 다른 구조를 띤다.
『악학궤범』에 <무고>를 출 때에 여러 주3가 <정읍사>를 부르는 노랫말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전강(前腔) ᄃᆞᆯ하 노피곰 도ᄃᆞ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소엽(小葉) 아으 다롱디리
후강(後腔) 全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ᄃᆞᄅᆞᆯ 주4
어긔야 어강됴리
과편(過篇) 어느이다 노코시라
금선조(金善調) 어긔야 내 가논ᄃᆡ 졈그ᄅᆞᆯ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소엽(小葉) 아으 다롱디리
<정읍사>는 이와 같이 노랫말이 전강 · 후강 · 과편으로 구분된다. 또한 만기 · 중기 · 급기의 세 틀로 된 연주법을 있었다. 후강(後腔) 부분의 경우, ‘후강전(後腔全)’이라는 주장과 ‘후강 전(全)져재’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서로 엇갈리고 있다.
<정읍>은 백제 때부터 불리었는지 단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지만, 늦어도 고려시대부터 궁중의 악무로 연주되어 오늘날까지 전승되는 천년 이상의 유구한 역사가 있는 곡이다. <정읍>은 궁중음악 중 백미로 꼽히는 아름다운 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