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을 이념적 기반으로 하여 건국한 조선은 유교에서 이상으로 여긴 제도인 정전제(井田制)의 이상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국가를 운영하고자 하였다. 정전론은 조선의 관료와 지식인들이 정전제를 자신들이 처한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제시하였던 여러 논의의 총칭이었다.
정전제는 중국 고대 하은주(夏殷周)시대의 토지제도였다. 『 맹자』와 『 주례』 등 유교 경전 기록에 따르면, 각 시대 및 지역별로 정전제 시행의 구체적 방식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토지를 ‘정(井)’ 자 모양으로 9등분한 후 8가구에게 외곽의 8구역을 거주지와 농경지로 지급하되 가운데 한 구역은 공전(公田)으로 8가구가 함께 경작하여 그 소출을 전부 세금으로 내게 하여 생산량의 1/10을 세금으로 거두게 하는 것이 그 기본 골자였다.
정전(井田)은 토지의 분급과 토지세의 부과 단위였을 뿐 아니라, 병농일치(兵農一致)의 군사단위이자 지방 행정단위로서의 위상도 가졌다. 정전제 하에서는 하나의 정(井)을 기준으로 일치된 행정과 군사조직이 마련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전체 국가의 행정단위가 구성되었던 것이다.
정전제는 여러 현실적 한계로 인해서 조선 사회에 직접적으로 시행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조선 전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관료와 지식인들은 각기 당대 사회에 대한 나름의 분석과 인식의 바탕 위에서 정전제를 현실에 합리적으로 적용하기 위한 방도인 정전론을 다양하게 전개하였다.
조선 전기 관료와 지식인들은 유교의 이상국가인 주나라의 제도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조선의 제도를 정비하고자 하였다. 이에 그들은 개국 이래로 주나라 제도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정전제에 대한 많은 연구와 논의를 전개하였다.
오랜 검토 끝에 조선 전기 관료와 지식인들은 정전제의 핵심이 1/10의 수조세율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있다고 판단하였다. 실제로 조선의 관료들은 세종 대에서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정전제의 1/10세 원칙을 추구하는 현실적 방안으로 공법 제도를 마련하고 이를 전국으로 확대시켜 나갔다.
17세기 이후 정전론은 기자정전(箕子井田)에 대한 탐구를 통해 정전은 실재한 제도이자 당시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개혁 이념으로 자리를 잡아가기에 이르렀다. 이는 명청 교체기를 배경으로 한 중화의식의 고양과 사적 토지 소유의 맹렬할 전개로 인한 현실 조건이 만나 나타난 이상사회의 전형이었다.
삼대지치(三代之治)와 정전으로 상징되는 성리학적 이상사회는 고제(古制)를 근거로 새롭게 소환되어 왕토사상(王土思想)에 입각한 새로운 공적 이념으로 방점이 찍히고 현실사회의 각종 문제를 개혁하기 위한 정당성이 부여되었다.
한백겸이 평양에 전해지는 기자정전의 터에 주목하고 전자형(田字形) 정전제를 주장한 것이 대표적이다. 정전론의 본격적인 전개는 한백겸의 설을 이어받은 유형원이 공전제 형태의 정전을 주장하면서 구체적인 형태로 제시하였다. 그는 토지의 사적 소유제의 전면화로 인한 농민층의 몰락에 대한 대응으로 정전제에 주목하였고, 당시 조선의 현실에 대한 면밀한 분석 위에서 토지를 국유화한 후, 군역과 직역에 따라 개인에게 일정한 크기의 토지를 분급하는 방식으로 토지와 백성을 긴박하는 공전제(公田制)를 구상하였다.
유형원의 공전제는 정전의 취지를 1/10세 · 병농일치 · 경묘법(頃畝法)으로 파악하고 이를 조선의 현실에 맞게 구현하고자 한 것이었다. 유형원 이후 이익, 정약용 등 여러 학자들이 정전론을 제기하였다.
이익의 정전론은 『맹자』의 정전제의 기록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통해 정전제의 핵심이 개인의 경작 면적과 무관하게 적용되는 1/10의 일관된 세율이라고 보았다. 이익은 1/10의 세율을 실현하기 위해 양전(量田)을 우선적으로 실시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미 토지 사유가 심화된 상황 속에서 국가가 토지 겸병을 효과적으로 타파하기 힘들다는 인식 속에서 이익은 그나마 현실에서 정전의 이상을 시행할 수 있는 방안으로 양전을 제시하였다.
정약용은 『 경세유표』의 전제조(田制條)에서 정전론(井田論)과 정전의(井田議)를 서술하여 기존의 정전론을 집대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였다. 정약용의 정전론은 기본적으로 토지 사유는 인정하되, 어린도(魚鱗圖)와 방전법(方田法)을 통해 일정한 면적의 토지를 기준으로 군사를 선발하고 조직하는 병농일치를 추구하였다. 또한, 정전제의 원칙을 원용해 병농일치와 더불어 128명을 단위로 지방의 행정과 군사조직을 일치시키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미 토지의 사유화를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 일정하게 구획된 토지에 따라 군사를 선발하고 군사와 행정 조직을 일치하는 방식으로 국가의 토지와 인민에 대한 일관된 지배를 관철하고자 했던 정약용의 문제의식을 잘 보여 준다. 또한, 이처럼 병농일치의 복구를 궁극적 목적으로 한 정약용의 정전론은 지방군의 정상화라는 문제의식도 담겨 있었다.
다산은 오랜 기간 조련이 정지되고 군사물자의 마련 등이 미비하여 점차 형해화되던 속오군 운영에 대한 일정한 반성 속에서, 정전제의 원칙을 원용하여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방식으로 지방군을 재건하고자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