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독수호통상조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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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고종 20)에 체결된 조선과 독일 사이의 통상 · 우호 · 항해 조약.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조독수호통상조약은 1883년(고종 20)에 체결된 조선과 독일 사이의 통상·우호·항해 조약이다. 1882년에 조미조약·조영조약이 체결되자, 북경주재 독일공사 브란트(Brandt, M. von)의 노력으로 「조독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영조약과 비슷한 내용으로 체결되었는데 영국과 독일 정부가 관세율을 구실로 비준을 거부하였다. 1883년에 조선과 독일 양국간의 우호관계의 유지, 최혜국 대우, 선박 내왕 및 관세규정, 밀무역 금지, 치외법권의 인정, 특권에 대한 균등 참여의 보장 등 독일의 이익과 요구가 반영된 새 조약을 체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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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883년(고종 20)에 체결된 조선과 독일 사이의 통상 · 우호 · 항해 조약.
개설

쇄국정책으로 일관해온 조선 정부가 1880년대에 들어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선두로 서양국가들과 맺은 조약들의 하나이다.

체결 과정

이 조약은 조선정부와 독일정부가 처한 특수한 사정으로 두 차례에 걸쳐 수정, 조인되는 번복을 겪었다. 1882년에 「조미조약」 · 「조영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자 북경주재 독일공사 브란트(Brandt, M. von)의 노력으로 1882년 6월 30일에 인천에서 「조독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선 측은 조영하(趙寧夏), 독일 측은 브란트가 서명한 전14조의 이 조약은 대체로 「조영조약」과 비슷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영국과 독일 정부는 문구의 애매성과 관세율을 구실로 비준을 거부하다가 재조약을 교섭해 왔다. 일본 요코하마(橫濱) 주재 총영사 차페(Zappe, E.)가 1883년 10월 27일에 서울에 와서 새 조약안을 제출하였다. 조선 정부는 독판교섭통상사무 민영목(閔泳穆)을 전권대신으로 임명해 협상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처음으로 중국의 알선을 배제하고 직접 협상에 임해 그해 11월 26일에 조인되었다. 같은 날 「조영조약」도 체결되었다.

내용

이 개정 조약에서는 독일 측의 이익과 요구가 상당히 반영되었다. 거중조정(居仲調停)에 대해서는 “이후 조약국의 한 나라가 타국(제3국)과 분쟁이 일어나 청원할 경우 체약국(締約國)의 다른 나라는 필요하면 법을 만들어 거중조정한다.”고 하였다. 「조미조약」에서는 ‘반드시 서로 돕고(必順相助)’라고만 되어 있었는데, 「조독조약」에서는 ‘필요하면 법을 만들어(應卽設法)’라고 고쳤다.

그리고 치외법권에 대해 「조미조약」에서는 “일후에 조선의 법률이 개정해 미국의 것과 일치하게 되면 철회한다.”고 했는데, 「조독조약」에서는 이 구절을 빼고 “독일 국민이 조선에서 범죄를 범하면 독일 재판 당국은 독일 법률에 의해 재단해 처벌한다.”고 하였다. 문제가 생길 우려가 있는 것은 처음부터 삭제한 이른바 불평등조약이었던 것이다. 조약의 유효기간도 「조미조약」에서는 5년으로 되어 있었으나 「조독조약」에서는 10년으로 고쳤고, 관세율은 5푼에서 2할로 하였다. 내용상으로는 대체로 「조영조약」과 같았다. 조선과 독일 양국간의 우호관계의 유지, 최혜국 대우, 선박 내왕 및 관세규정, 밀무역 금지, 치외법권의 인정, 특권에 대한 균등 참여의 보장 등이 규정되었다.

이상의 조약문 외에 ‘조선에 있어서 독일 통상거래에 관한 규정’과 ‘체결의정서’가 붙어 있다. 조약문은 독일어 · 영어 · 중국어로 3부 작성되었다. 현재 독일어 조약문은 ‘독일국가문서’에 수록되어 있고, 한국어 번역문은 국회도서관에서 낸 『구한국조약휘찬』에서 볼 수 있다. 「조독조약」은 한말에 조독관계의 길을 활발하게 터놓았고, 1905년 11월 7일 을사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이 일본에게 박탈될 때까지 유효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외교권이 상실되자 1905년 11월 30일 주한 영국공사관의 철수에 이어 다음 해 2월까지 각국 공사관들이 폐쇄되면서 조독 외교관계도 중단되었다.

「조독조약」에 의해 조선에 부임한 외교관은 총영사 젬브슈(Zembsch), 부영사 겸 영사대리 부들러(Budler, H.), 총영사 크리인(Krien, F.), 총영사 켐퍼만(Kempermann, T.), 총영사 라인스도르프(Reinsdorf, F.), 총영사 바이페르트(Weipert, H.), 변리공사 살데른(Saldern, C. von)이 있었다. 독일에서는 처음에 함부르크에 마이어(Meyer, E.)가 명예영사로 활동하다가 1901년에 초대공사로 민철훈(閔哲勳)이 부임했으나 조선의 외교권이 상실되면서 두 정부의 외교관계도 중단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구한국외교문서(舊韓國外交文書)』
『한독수교100년사(韓獨修交100年史)』(국사편찬위원회, 1984)
『한독교섭사(韓獨交涉史)』(최종고, 홍성사, 1983)
『덕서(德書)』(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1966)
『구한국조약휘찬(舊韓國條約彙纂)』(국회도서관, 1964)
『100Jahre deutsch-koreanische Beziehungen : Bilanz einer Freundschaft』(Kommitee 100 JahreDeutsch-Koreanische Beziehungen, Bonn, 1984)
「Deutschland und Korea」(Walter, L., 『독일학연구(獨逸學硏究)』 2, 1981)
Dreiunddrei-βig Jahre in Ostasien(Brandt, M. von, Leipzig,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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