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견학리 토성 ( )

건축
유적
문화재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견학리에 있는 삼국시대 방형의 평지 토성.
이칭
약칭
견학리 토성
유적
건립 시기
9세기
관련 국가
신라
높이
5m
둘레
214m
소재지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견학리 441 일대
시도지정문화재
지정기관
충청북도
종목
시도기념물(2006년 1월 6일 지정)
소재지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견학리 441 일대
내용 요약

충주 견학리 토성은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일대에 위치한 평지 토성이다. 가섭산 자락이 동쪽에서 평지를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구릉 말단부에 만들어졌고, 동쪽으로 요도천과 평지가 보인다. 충주 견학리 토성과 관련된 문헌 자료는 확인되지 않지만, 1980년의 지표 조사 과정에서 그 존재가 확인되었다. 두 차례의 발굴 조사를 통하여 남북 축으로 약 58m, 동서 축으로 49m의 방형임이 밝혀졌으며, 추정 둘레는 약 214m이다. 성벽은 중심 토루와 내외피 토루가 있는 토성임이 확인되었는데, 9세기를 전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견학리에 있는 삼국시대 방형의 평지 토성.
위치

충주 견학리 토성은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일대에 위치한다. 주2 자락이 동쪽에서 평지를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구릉(해발 110~114m) 말단부에 토성이 만들어졌는데, 동쪽으로 요도천과 평지가 보인다.

발굴 경위 및 결과

충주 견학리 토성과 관련된 문헌 자료는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주17라는 지명도 전근대 지리지에서 확인되지 않으며, 일제강점기에 불견리와 학성리를 합치면서 만들어진 지명으로 알려져 있다.

기록으로 전하지 않던 충주 견학리 토성은 1980년의 지표 주18 과정에서 처음으로 존재가 확인되었다. 최초 지표 조사에서 충주 견학리 토성은 일종의 선사시대 취락과 관련된 시설일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이후 인근에 벽돌 공장이 건립되면서 서벽이 훼손되었다. 1991년과 2000년에 두 차례 발굴 주19가 진행되어 기본적인 성격을 규명할 수 있었다.

견학리 토성은 성 하단부를 기준으로 북벽 44m, 동벽 58m, 남벽 32m가 남아 있었다. 남북 축으로 약 58m, 동서 축으로 49m의 방형으로 추정 둘레는 약 214m이다. 성벽의 높이는 북벽의 폭이 5~6m이고 남벽의 폭은 2.5~3m이다. 잔존한 성벽의 높이는 2~3m 정도이지만 원래 성벽의 높이는 약 5m 내외일 것으로 추정된다.

1991년에 이루어진 조사에서 토성 내에 청동기 시대 무문 주20주4이 수습되었고 내부에서 초기 철기시대~삼국시대의 토기편도 일부 수습되었지만, 관련 주5는 조사되지 않았다.

성 내부에서는 고려시대 토기편이 수습되었고, 더불어 성격 미상의 적석(積石) 유구와 주9, 배수로 유구 등이 조사되었다. 그렇지만 건물지로 볼 수 있는 명확한 주거 흔적이 확인되지 않았으며, 성 내부에서는 기와도 전혀 수습되지 않았다. 다만 성 내부에서 주10이나 주11, 주12편과 같은 9세기 대로 주13되는 유물이 주로 수습되었다.

토성벽 외곽에서 주8의 흔적도 확인되었다. 자연적인 경사면을 이용하여 토성을 축조한 지점도 있지만, 남벽에 해당하는 평지 지역은 생토면을 주21하여 해자에서 파낸 주6주7를 이용하여 최고 2m 높이로 주22하였다.

토성의 중심 주1 하단부 내외 측으로는 토성의 기초를 이룬 석렬이 확인되며, 중심 토루 내외 측에 내외피 토루를 조성하였다. 외피 토루 하단에는 330cm 간격의 주14이 확인된다. 한 차례 이상 주15한 흔적도 확인되지만, 충주 견학리 토성은 석축 기단을 갖추고 3.8m 간격의 주혈이 확인된다는 점에서 9세기 대에 축조된 신라의 토성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다. 토성의 절개 조사 구간에서 고려시대 토기임이 확인되는 주23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충주 견학리 토성은 9세기를 전후하여 지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조사 결과를 통하여 충주 견학리 토성은 신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호족이 등장하고, 호족들이 주16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지어지고 운영된 평지 토성으로 볼 수 있다. 성 내부에서는 주거 흔적이 확인되지 않아서 성의 성격을 규명하기가 쉽지 않지만, 곡식 등을 저장하기 위한 창고성 또는 특수한 용도의 어떠한 시설로 운영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충주 견학리 토성 주변에 숭선창과 미륵원이 위치한 것이 확인된다. 주변의 유적과 연계하여 생각해 본다면 충주 견학리 토성은 남한강 수계를 통하여 계립령 일대로 연결되는 교통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견학리 토성은 충주 일대에서 교통로를 통제하는 역할도 수행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평지에 축조된 소규모 토성이란 점에서 평택과 용인 지역에서 확인된 평지 토성과 유사한 규모와 입지가 주목된다. 주변 지역 토성은 창고성의 역할을 하면서 고려시대에도 지속적으로 활용되었다. 그렇지만 견학리 토성에서 수습된 고려시대 유물의 수량은 미미한 편이다. 따라서 충주 견학리 토성은 9세기 대에 축조되어 운영되었으나, 고려 전기에는 성의 기능을 이미 상실하고 폐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의의 및 평가

충주 견학리 토성은 기록에 전하지 않다가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주24이다. 인근 탄금대 토성과 다르게 건축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나말여초인 9세기 대에 호족 세력에 의해 건립되어 고려시대까지 운영되었다. 대체로 주거의 목적보다 창고 등의 특수한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어, 인근 지역의 평지 토성과의 비교 자료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중원 견학리토성』(충북대학교 박물관, 1992)
『충주 견학리토성 Ⅱ』(충북대학교 박물관, 2002)
『중원의 산성』(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2008)

논문

강민식, 윤대식, 「충주 견학리토성과 중부지역의 판축토성」(『한국성곽학보』 18, 한국성곽학회, 2010)
주석
주1

굴착 공사에서, 특정 부분의 지지물로서 임시로 지표에 남긴 커다란 덩어리. 우리말샘

주2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과 충주시 신니면 사이에 있는 산. 문화재로 가섭사(迦葉寺)가 있다. 높이는 710미터. 우리말샘

주3

표면에 그리거나 새긴 무늬가 없음. 우리말샘

주4

돌로 만든 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석기 유물로 양 측면에 날이 서 있으며 손잡이 부분의 형태에 따라 자루식과 슴베식이 있다. 우리말샘

주5

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 우리말샘

주6

세토(細土) 가운데에서 점토 함량이 50% 이상인 토양. 우리말샘

주7

모래 성분이 많은 흙. 우리말샘

주8

성 주위에 둘러 판 못. 우리말샘

주9

땅 표면에서 아래로 파 내려간 구멍. 고대인(古代人)들이 주거 양식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우리말샘

주10

자라 모양으로 만든 병. 납작하고 둥근 몸통에 짧은 목이 달려 있다. 여행을 하거나 들에 나갈 때 물이나 술을 담는 데에 쓰인다. 우리말샘

주11

접시에 높은 굽을 붙인, 고대 식기의 하나. 동남아시아에서는 이른 시기부터 사용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김해ㆍ경주 등지에서 많이 발굴된다. 우리말샘

주12

높이가 1미터 이상인 독. 우리말샘

주13

연대순으로 역사를 편찬함. 우리말샘

주14

움집터의 바닥 같은 데에 기둥을 세우기 위하여 파 놓은 구멍. 우리말샘

주15

집이나 다리, 방죽 따위의 헐어진 곳을 고쳐 짓거나 보수함. 우리말샘

주16

어떤 지역의 행정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이 있는 곳. 우리말샘

주17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에 있는 이. 신니면의 동부에 위치해 있으며, 대부분 평지와 구릉지이다. 북서쪽에 사리들ㆍ긴밭들ㆍ방아골 계곡이 있으며, 3번 국도가 지난다. 우리말샘

주18

어떤 지역 내에 있는 유물의 유무, 분포, 성격 따위를 파악하기 위해 땅 위에 드러난 유적ㆍ유물을 훼손하지 않고 조사ㆍ기록하는 일. 우리말샘

주19

땅속에 묻혀 있는 것을 파내서 그것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조사. 또는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을 찾아 밝혀내기 위해 하는 조사. 우리말샘

주20

청동기 시대에 사용한 무늬 없는 토기. 지역에 따라 팽이형 토기, 미송리식 토기, 화분형 토기 따위가 있으며 빛깔은 붉은 갈색이다. 우리말샘

주21

땅을 반반하고 고르게 만듦. 또는 그런 일. 우리말샘

주22

판자와 판자 사이에 흙을 넣고 공이로 다지는 일. 또는 그 판자와 공이. 우리말샘

주23

유물이 있어 과거의 문화를 아는 데 도움이 되는 지층(地層). 우리말샘

주24

평지에 둘러쌓은 성. 고구려의 요동성, 발해의 상경 용천부가 이에 속한다.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윤성호(한성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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