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당시 낙동강 돌출부인 창녕∼영산 지역에서 미 제2사단이 북한군 제1군단 예하의 제4사단과 낙동강을 사수하기 위해 결전을 벌인 전투이다.
전투 기간은 1950년 8월 31일부터 9월 17일까지이다. 미 제2사단은 8월 하순 제24사단에게서 작전지역을 인수받아 제9연대를 영산 정면의 부곡리에서 남지까지, 제23연대를 창녕 정면, 그리고 제38연대를 현풍 정면의 강안고지에 각각 배치하여 진지 편성에 주력하고 있었다.
반면 북한군 제1군단 예하 제2공격집단은 제9사단이 8월 말경부터 제9연대 영산 정면에, 김천에서 재편성을 완료한 적 제2사단이 창녕 정면에, 적 제10사단이 현풍 정면 낙동강 대안에 집결하여, 8월 31일 오후 10시를 기해 최후 공세를 준비하였다.
8월 31일 적 3개 사단의 기습으로 9월 1일 미 제2사단의 작전지역이 돌파당하여 낙동강 동쪽의 오봉리(吾鳳里)∼주매리 · 본초리(本招里) 선에서 저지하였다. 이후 미 제2사단 작전지역은 창녕과 영산의 2개 지구로 양단되었고, 적 제2· 제9의 2개 사단과 대치한 상태에서 반격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창녕 일대에서 9월 15일 미 제2사단장 케이저(Lawrence B. Keiser)는 먼저 낙동강 동쪽지역, 곧 오봉리∼본초리 선에서 저항하는 적을 낙동강 서쪽 대안 너머로 격퇴한 다음, 낙동강의 도하지점에 교두보를 확보하여 다음 작전을 준비하려 하였다.
이에 미 제2사단은 좌에서 우로 제9· 제23· 제38연대 순으로 3개 연대를 병진대형으로 전개하여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공격 첫날 좌일선의 미 제9연대는 사곡산(寺谷山 : 201고지) 일대에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적진 앞에서 공격이 꺾었다.
반면 중앙 일선인 미 제22연대는 16일 새벽, 곧 아군이 공격하기 4∼5시간 전에 적이 C중대를 기습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였으나, 제3대대를 주공으로 하여 주진지에서 완강하게 저항하는 적을 일단 물리치는데 성공하였다.
12시를 조금 지난 무렵부터 아군 전폭기의 지원이 개시될만큼 날씨도 호전되었다. 미 제23연대장은 제3대대를 주축으로 한 특수 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전과 확대로 전환하는 즉시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였다.
상황이 이처럼 호전되자 제2대대는 박진(泊津) 나루터를 통제할 수 있는 전술적 중요 고지인 208고지를 탈환하였고, 아군 전폭기는 혼란상태로 빠져들어 무질서하게 낙동강 서안으로 걸어서 물을 건너는 적을 맹공하여 많은 피해를 주었다.
그 후 적의 퇴각은 다음날까지 계속되어 17일에는 낙동강 동쪽 오봉리∼본초리 일대에서는 적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이로써 미 제2사단의 적 방어진지 돌파작전은 거의 일단락되었다.
당시 격전지였던 창녕의 교상리에는 북한군 제4사단과 전투를 벌여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한 미군의 공을 기리고자 1959년 3월 31일자로 창녕지구 전투전적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