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2년(고종 19) 6월 고려는 몽골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천도(江華遷都)를 단행하였다.
그러자 그해 몽골의 장수 살례탑(撒禮塔)[몽골명: 살리타이, 사르타이]가 고려의 북계(北界: 현, 평안도)에 침입하여 서경(西京)의 반적(叛賊) 홍복원(洪福源)과 합세하여 고려를 위협하였다. 몽골의 제2차 침입이 개시된 것이다. 살례탑은 고려가 강화도(江華島)로 도읍을 옮긴 것을 꾸짖고, 국왕이 육지로 나올 것을 요구하였으나 고려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살례탑은 북계에서 남쪽으로 개경(開京)을 거쳐 한양산성(漢陽山城)을 함락하고, 광주(廣州)를 거쳐 수주(水州: 현, 경기도 수원시)에 속해 있던 처인부곡(處仁部曲: 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의 소성(小城), 즉 처인성(處仁城)에 도달하였다. 광주산성(廣州山城) 전투 이후 중부 지역을 거쳐 경상도 방면으로 남하하는 도중이었다.
그때 마침 난을 피하여 처인성에 들어와 있던 백현원(白峴院)의 승려 김윤후(金允侯)가 함께 입보해 있던 처인부곡민(處仁部曲民) 및 승려들을 지휘하여 살례탑을 사살하였다. 그때가 1232년 12월 16일의 일이었다. 장수를 잃은 몽골군은 전의를 상실하여 부장 철가(鐵哥)의 인솔로 곧 북으로 철수하였다.
처인성전투의 승리로 몽골군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남쪽 지방은 전쟁의 피해를 면하게 되었고, 천도 이후 고려가 장기 항전의 계기를 조성하였다.
처인성 주1의 결과, 처인부곡은 처인현(處仁縣)으로 승격되었다. 김윤후는 상장군(上將軍)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사양하여 섭랑장(攝郎將)이 되었고 이후 1250년(고종 37) 충주산성(忠州山城) 방호별감(防護別監)으로 파견되어 야굴(也窟)[몽골명: 예쿠, 에쿠]의 몽골군을 물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