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덕지 초상 및 유지 초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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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지 초상 및 유지 초본
최덕지 초상 및 유지 초본
회화
유물
문화재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최덕지(崔德之)를 그린 조선시대 초상화 원본과 그 초본.
이칭
이칭
최덕지영정및유지초본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명칭
최덕지 초상 및 유지초본(崔德之 肖像 및 油紙草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보물(1975년 05월 16일 지정)
소재지
전라남도 영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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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최덕지 초상 및 유지 초본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최덕지를 그린 조선시대 초상화 원본과 그 초본이다. 세로 74㎝, 가로 53㎝이다. 화가의 초안 과정을 보여주는 「최덕지 초상」 초본은 유지 바탕에 필묵으로 선묘한 것으로 원본과 거의 동일한 크기이다. 여말선초 초상화의 상용 형식, 복색, 필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초상화의 본령이 형태를 그리는 데에 한정되지 않고 정신을 그리는 데에 있음을 대변해주는 작품이다. 현재 전라남도 전주 최씨 문중에 보존되어 있다. 1975년 원본과 유지본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최덕지(崔德之)를 그린 조선시대 초상화 원본과 그 초본.
개설

197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74㎝, 가로 53㎝. 『연촌유사(烟村遺事)』에 의하면 최덕지 영정은 원래 3본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 1본은 생전에 그린 진상(眞像)으로서 존양루(存養樓) 옛터 근방 영당(影堂)에 봉안되었다. 나머지 2본 중 1본은 녹동서원(鹿洞書院)에, 1본은 주암사(舟巖祠)에 봉안되었다. 현재는 원본, 이모본(移模本) 및 유지본(油紙本)이 전라남도 전주 최씨 문중에 보존되어오고 있다. 그 중 원본과 유지본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내용

원본의 작품상 특징을 살펴보면, 우선 화폭은 가운데에서 연결된 연폭(連幅)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시대 초상화에서의 연폭 형식은 대부분이 3폭이다. 그래서 얼굴 부분이 들어가는 중폭(中幅)이 가장 크며, 양 옆으로 두 개의 소폭이 결봉되는 방식인 데 비하여 이 최덕지 초상의 연폭 형식은 특이하다.

인물의 복장으로 인하여 이 초상화가 더욱 주목된다. 모자는 감투형에서 평량자형(平凉子型: 패랭이)으로 발전되어 가는 과도기적 형태로서 최덕지가 생존하였던 여말선초(麗末鮮初)의 한 형식을 보여준다. 이러한 입제(笠制)는 발립(鈸笠: 몽고식 모자)의 형태이며, 포제(袍制)는 일색복(一色服)으로서 고려 말로부터 전승되어 온 원나라의 영향이 조선 초까지 그대로 남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최덕지 초상의 차림새는 여말선초 선비의 한거(閒居)하는 모습에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초상화에 나타난 얼굴 모습으로 미루어보아, 이 초상은 최덕지 만년기의 모습이다. 안면 및 옷주름 처리에서 실물에 핍진(逼眞)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발립은 반투명으로 안의 상투 부분이 검게 비치고 있으며, 안색은 전반적으로 갈색계의 색조를 띠고 있다. 눈썹은 담묵으로 칠한 위에 그 털은 한 올 한 올 표현되었다.

짙은 눈썹과는 대조적으로 작은 눈매에서는 생기있는 명상적 눈빛을 보여 준다. 그러나 회화사적인 흥미를 끄는 것은 비화법(鼻畵法)이다. 최덕지의 코 형태는 주먹코이다. 조선 초기 초상화의 대부분이 8, 9분면의 취세에도 코를 거의 옆모습으로 나타냈다. 이에 비해서 이 초상화에서 코 처리는 사상에 바탕을 둔 시각적 진실을 보여준다.

안면 처리를 세밀히 살펴보면, 이른바 법령(法令: 코 가장자리에서 입 양쪽 끝으로 이르는 부분) 및 뺨에 고심세(高深勢: 높고 낮은 형세)가 표현되어 있다. 이를테면 이 부위에는 안색보다 짙은 갈색으로 음영 처리가 되어 있고, 원공[귀의 원문(圓文)] 역시 그러하다. 바로 이 점이 개채(改彩)를 의심하게 한다.

『연촌유사』에 의하여 이에 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이 초상화는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에 나주 묘산(墓山)에 묻었다가 왜구가 물러가고 수년 후 파보니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개장의 필요가 있었던 듯 『연촌유사』에는 ‘화상개장찬문(畵像改粧贊文)’이 수록되어 있다. 1610년(광해군 2) 4월에 개장하여 덕진교(德津橋)로 옮긴 것이 1635년(인조 13) 2월이라 한다. 그 간의 시일이 오래 경과된 사유가 분명하지 않으나, 개장 후 초상화를 종손가에 모신 사실이 확인된다. 개장 때 개채하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 개채로 인하여 원본이 손상되기보다 오히려 취(趣)가 더욱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이 화상은 안면 및 시선은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몸체는 정면을 향해 있기 때문에 자연히 오른쪽 어깨와 팔이 정면에 맞도록 돌려져 있다. 이 점이 인물의 표현상 대칭성에서 벗어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표현적 특색으로 변질된 면도 있다. 발 부분이 표현되지 않고 손이 나와 있는 점은 그 후의 조선시대 초상화와는 다른 특징이다. 역시 고려시대 초상화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말해준다.

의의와 평가

최덕지상을 그린 화사(畵師)는 알 수 없지만, 세밀한 관찰력과 직관의 소유자였음이 분명하다. 신천익(愼天翊)의 화상찬이 말해주듯이 당대에도 이 작품의 우수성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희귀한 여말선초 초상화의 상용 형식, 복색, 필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동시에 초상화의 본령이 형태를 그리는 데에 한정되지 않고 정신을 그리는 데에 있음을 대변해주는 뛰어난 작품 중 하나이다.

화가의 초안 과정을 보여주는 『최덕지 초상』 초본은 유지 바탕에 필묵으로 선묘한 것으로 원본과 거의 동일한 크기이다. 초본과 원본은 조선초기 초상화의 제작과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연촌유사(烟村遺事)』
『한국의 초상화 -형과 영의 예술-』(조선미, 돌베개, 2009)
『한국의 초상화』(조선미, 열화당, 1983)
『조선왕조시대의 초상연구』(조선미, 홍익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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