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객기는 이날 낮 12시 23분 강릉발 서울행 대한항공 소속 YS-11A여객기로 승무원 4명과 승객 47명을 태우고 대관령 상공에서 객석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승객을 가장한 고정간첩 조창희(趙昶熙)가 권총을 들고 갑자기 조종사실에 뛰어들면서 기수는 북쪽으로 향하였다. 총격은 없었다. 휴전선을 통과, 북한으로 공중 납치되었다.
여객기는 원산∼함흥 사이에 위치한 북한의 선덕비행장에 강제 착륙되었다. 긴급 출동한 북한기 2대가 선덕비행장으로 유도하였고, 착륙하자 범인 조창희가 제일 먼저 내려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검은 세단차에 타고 모습을 감추었다.
사건 발생 다음날인 12일 북한은 착륙 지점을 밝히지 않고 ‘두 조종사에 의한 자진 입북’이라는 간단한 보도를 했을 뿐 일체 침묵을 지켰다. 이 사건은 1958년 2월 16일 민간항공기 KNA 소속 창랑호를 납치한 데 이어 두번째였다.
1969년 12월 22일 판문점에서는 유엔군측의 요청으로 군사정전위원회 비서장회의가 열려 승객 · 승무원 및 기체의 조속 송환을 요청했으나, 북한측은 “유엔군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딴전을 피움으로써 인질 외교의 저의를 드러냈다.
우리측은 미국 · 인도 · 파키스탄 · 멕시코 등 15개국 적십자사를 통하여 중재 교섭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묵살되었다. 세계 12개의 주요 민간항공회사에서 북한의 항공기공중납치사건을 규탄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전국 23개 지역에서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였다.
북한은 1969년 12월 24일 ‘조종사 환영 시민대회’를 열어 정치 선전 조작극을 벌였고, 5개 민간단체로 쌍방간에 송환교섭단을 만들자고 엉뚱한 제의를 하였다. 그러다가 납치 55일 만에 승객을 송환하겠다고 통보해 왔다.
그러나 북한은 약속일인 1970년 2월 4일(구정 전날)에 보내지 않고 납치 66일 만인 2월 14일 판문점을 통해 51명 중 조종사 등 12명을 억류하고 37명만을 송환하였다. 북한은 개별 심문에서 모두에게 고문을 자행하였고, 송환되어 온 손호길(孫鎬吉)은 정신 이상으로 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