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위원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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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상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프랑스 파리에 설치한 외교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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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19년 4월 상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프랑스 파리에 설치한 외교부서.
개설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문제를 호소, 독립을 청원할 목적으로 만들었다.

내용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승국 대표들이 전후(戰後)의 새로운 세계질서를 마련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에서 강화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미국에 있던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는 1918년 10월 1일 회의를 소집, 강화회의에 파견할 한국 대표를 선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상해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결성하고 국민 대표로 김규식(金奎植)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였다.

1919년 2월 1일 김규식은 상해를 출발하여, 같은 해 3월 13일 파리에 도착하였다. 같은 해 4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정부는 김규식을 외무총장으로 임명하고 평화회의 대한민국위원 겸 주파리위원으로 임명하여 신임장을 파리로 발송하였다. 이로부터 김규식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주파리위원부 위원으로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였다.

파리강화회의에서는 열강들의 약소국에 대한 의견 무시로 성과를 거둘 수 없었지만, 선전활동을 활발히 전개해 한국 문제가 국제 문제로 부각되도록 힘을 다하였다. 또한 7월에는 국제사회주의자대회 의장에게 일제침략을 비난하는 서한을 발송하였다.

또 루체른 회의에서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요청하였다. 스위스 루체른에서 열린 제2차 인터내셔널회(만국사회당대회)에 파리위원부 부위원장 이관용(李灌鎔)과 조소앙(趙素昻)이 대표로 참가해, 「한국민족독립결정서」를 제출하여 채택하는 데 성공하였다.

8월 8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소환명령으로 김규식이 미국으로 떠나자 이관용이 위원장대리가 되고, 황기환(黃玘煥)이 서기장이 되어 위원부 활동을 계속하였다. 10월 10일에는 이관용의 사임으로 황기환이 일을 맡아 외교활동 및 선전활동에 특히 주력해, 한국에 관한 기사가 유럽의 181종 신문에 517회에 걸쳐 게재되도록 하였다.

또한 각종의 국제적 모임에 대표로서 참여해 활발하게 활동함으로써, 특히 영국의 경우 한국에 대한 관심과 후원을 맡을 대영제국한국친우회(大英帝國韓國親友會)가 결성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황기환은 영국인들의 높은 관심과 호응으로 1923년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파리위원 겸 런던주차위원’으로서 런던에 상주하며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파리위원부는 1919년부터 1923년까지 프랑스 파리와 영국 런던을 중심으로 외교 및 선전활동을 활발히 전개해 유럽 각국에 한국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하여, 한국이 일제의 압제에 억압받고 있는 실상을 널리 알리는 한편, 유럽에서 한국의 외교적 지위를 인정받도록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참고문헌

『독립신문(獨立新聞)』
『대한민국임시정부사』(이현희, 집문당, 1982)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구미와의 관계」(신재홍, 『한국사론』10, 국사편찬위원회, 1981)
「한국임시정부의 외교에 관한 연구」(추헌수, 『연세논총』10,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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