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소년병학교는 1909년 6월 독립군 양성을 목적으로 박용만(朴容萬)의 주도하에 미국 네브래스카(Nebraska)주 커니(Kearney)시에 세워진 학교이다. 다음 해 헤이스팅스(Hastings)시로 이주하여 1914년까지 6년에 걸쳐 존속하며 90여 명의 학생을 배출하였다. 최신 군사 훈련을 받은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908년 박용만의 주도하에 미국 콜로라도(Colorado)주 덴버(Denver)시에서 열린 애국동지대표회의(愛國同志代表大會)에서 한인군사훈련양성소를 설립키로 한 안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1909년 6월 미국 네브래스카주 커니시에 임대농장을 마련하여 설립되었다.
최신 군사 훈련을 받은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네브래스카에 거주하는 모든 한인이 소속되어 의무금을 내는 네브래스카 한인공회(韓人公會)를 만들어 학교 운영을 하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하와이 노동이민자 조진찬(曺鎭贊)의 농장 집에 학교를 설립하여 군사 교육을 실시하였다가 헤이스팅스대학 재무이사 존슨(P. L. Johnson)의 주선으로 대학의 기숙사와 학교 시설 일부를 사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1910년 6월부터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운영되었다.
소년병들은 오전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오후에 학과 수업을 시작하였다. 이들이 배우는 학과목은 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수학, 역사[미국과 조선], 지리, 과학, 성서 등 다양하였다. 병학으로는 보병조련, 군대내무서, 육군예식, 군인위생, 군법통용, 명장전법 등을 배웠다. 정신교육은 독립군 장교로서 지도자의 자질을 갖추기 위한 과정으로 박용만은 인내심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1863년 스프링필드 조병창(The Springfield Armory)에서 제조한 구형 소총(小銃)으로 훈련하였다. 실제 사격 연습도 하였다. 과외 활동으로는 육상반, 야구반, 연극반이 있으며 학생들이 직접 조직하여 운영하는 형태였다. 1910년에는 5~6명의 교사가 있었으나, 1914년에는 10명 이상의 교사가 다양한 과목을 지도하였다. 1911년 8월 첫 졸업식을 갖고 13명에게 졸업장을 수여하였다.
1911년까지 3년 동안 꾸준히 증가하던 학생 수는 1913년부터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는 후원자들과 지도교사들의 이주, 장기적인 무장독립투쟁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현실, 일본의 항의 등의 이유 때문이었다. 결국 1914년 8월 마지막 졸업식을 거행한 뒤 문을 닫게 되었다. 6년 동안 배출한 학생 수는 90여 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