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1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소앙(趙素昻)에 의해 제의되었고, 중국 측 인사들의 찬동으로 설립이 추진되었다. 4월 15일 주비회(籌備會)를 결성하여 협회 설립을 준비하였다. 10월 11일 충칭 중국방송국 대강당에서 김구(金九), 조소앙, 이청천(李靑天), 김원봉(金元鳳) 등 한국 측 인사들과 쑨커[孫科], 우톄청[吳鐵城], 바이충시[白崇禧], 펑위샹[馮玉祥], 저우언라이[周恩來] 등 중국 측 인사를 비롯한 4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성립식을 거행하였다. 장제스[蔣介石] 군사위원회 위원장도 훈사(訓詞)를 보내 협회의 성립을 축하하였다.
한국과 중국 인사들로 구성된 민간적 차원의 기구였고, '한중 문화를 발양하며 양 민족의 영구 합작을 가강(加强)함.', '한중 호조를 촉진하여 동양의 영구 평화를 수립함.'을 종지(宗旨)로 삼았다. 회원은 400여 명이었으며, 조직은 크게 상무이사, 상무감사, 비서장과 3개의 위원회[연락, 연구, 선전]로 구성되었다.
본부를 충칭에 두었고, 각 지방에 분회를 설립하며 조직을 확대하였다. 이들은 한중 간의 우호와 협력방안을 논의하고,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방안을 강구하였다. 기관지는 충칭에서 발행한 『중한회신(中韓會訊)』과 성도분회(成都分會)에서 발행한 『중한문화(中韓文化)』가 있다.
대표적인 활동은 회원을 주축으로 하여 한중 인사들의 모임을 갖는 것이었다. 특히 기념일을 비롯해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는 강연회나 좌담회 등을 개최하였다. 문화 교류를 위해 협회의 부설로 한문반(韓文班)을 설립하여 중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중국에서 공부하는 한국인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인재를 양성하였다.
이 밖에도 도서 출판과 연극을 공연하는 활동 등 문화적인 분야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43년 11월 『삼민주의(三民主義)』를 한국어로 발행하였고, 한국의 애국가를 중국어로 번역 출판하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해방 이후 한국 측 인사들이 환국하면서 활동이 중단되었다. 1965년 한국에서 이를 계승하는 한중문화협회를 결성하여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