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일제의 토벌 정책과 초토화 작전으로 어려운 처지에 빠진 조선혁명군 제1사(師) 한검추(韓劍秋) 부대가 그해 9월 20일 중국 요녕성(遼寧省) 집안현(輯安縣)에서 요녕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왕펑거 부대와 회합하고 공동투쟁을 결의하여, 11월 조직된 단체이다.
한중항일동맹회의 정치위원회 위원장은 당시 조선혁명군정부(朝鮮革命軍政府)의 수반이던 고이허(高而虛)가 맡았고, 군사위원회 위원장은 왕펑거, 군의 총사령관은 한검추가 선임되었다. 전체 병력은 1,150명 정도로, 이 중 한검추 산하 조선혁명군 부대가 100여 명이었다.
한중항일동맹회는 정강(政綱)에서 "본 동맹회는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중국 동북 실지를 회복하며,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함"을 명시하여 투쟁목표를 밝혔다. 동맹회를 통해 조선혁명군은 왕펑거 부대로부터 적지 않은 무기와 식량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또한, 일부 참모와 전투원에 중국인을 편입시켜 한중 합작의 의미를 확대하고 항전 역량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조선혁명군은 국내 진입 작전을 전개하여 일제의 치안을 교란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36년 6월, 장진봉(張珍奉) 등 10여 명의 소부대가 평안북도 초산에 진공하였고, 9월에는 압록강 연안의 위원(渭原) · 벽동(碧潼) 파출소를 기습하였다. 10월에는 정운준(鄭雲準) 등 5명의 대원이 벽동의 한 파출소를 기습 공격하여 순사 4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한중항일동맹회는 일본 관동군(關東軍)과 만주국(滿洲國) 군경의 공세가 강화되면서 1936년 말부터 1937년 초까지 왕펑거 부대가 거의 궤멸되고, 1937년 3월 왕펑거가 체포 · 처형됨으로써 해체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