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상하이[上海]에 거점을 두고,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상하이는 중국의 동해안에 있는 도시였기 때문에, 대한민국임시정부에게는 중국 내륙과 주요 도시로 활동 가능한 범위를 확장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 방법 중 하나로 제시된 것이 한국과 중국 사이의 우호단체 결성이었다. 그 시초는 1921년 1월에 한커우[漢口]에서 임시정부 선전원 이우민(李愚珉), 황영희(黃永熙), 이기창(李基彰) 등이 중국인들과 함께 결성한 한중호조사(中韓互助社)였다. 이어 창사[長沙], 안후이[安徽], 충칭[重慶]에서도 차례로 한중호조사가 결성되었다. 상하이에서는 5월 28일에 한중호조사 총사(總社)가 결성되었다.
1921년 9월 광저우에서도 한중 인사들로 구성된 단체가 결성되었다. 그런데 광저우에서 결성된 것은 호조사가 아닌 한중협회였다. 1921년 9월 23일 광저우도서관에서 발기인 대회를 열고, 9월 27일 정식으로 성립대회를 통해 결성되었다. 성립대회에는 한국 측 임근(林勤), 이우민, 김기제(金奇濟) 등이 추가된 7명이, 중국 측에서는 예샤셩[葉夏聲], 팅샹첸[丁象謙], 주녠쭈[朱念祖] 등이 참석하였다. 중국 측 참석자들은 비상국회(非常國會) 의원이며, 국민당(國民黨) 호법정부(護法政府)에 참여하고 있었다.
광저우에서 한중협회가 결성된 데에는 몇 가지 배경이 있었다. 하나는 중국의 주요 도시에 한중호조사가 결성되는 과정이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1919년 8월 임시정부의 김창숙(金昌淑)이 쑨원[孫文]의 초청으로 광저우를 방문했을 당시에 구축한 인적 네트워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이 시기에 임시정부 특사 신규식(申圭植)이 광주를 방문하였기 때문이다.
광저우의 한중협회는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에서 일본의 주장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관지 『광명월보』를 발간하기 위한 기부금을 모집하였다. 여기에는 광저우 시장 쑨커[孫科] 등을 비롯한 유력인사들이 참여하였다.
협회의 사무를 위해서 학술, 의사(議事), 간사, 문서 등 4개의 부서와 주임 1명, 부주임 2명의 인력을 배치하였다. 한중협회는 중국 쑨원의 호법정부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공식 승인하는 등의 우호 관계 속에서 성립된 한중 연대라는 의의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