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는 수립 초기부터 대중국 외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3 · 1운동에 이어 발생한 중국의 5 · 4운동을 통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과 중국 측 인사 사이의 교류는 양측 사이에 항일연대의식을 자리잡게 하였다. 이러한 의식 속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중 양국 사이에 한중친목회(韓中親睦會)와 같은 우호단체를 결성하고자 하였다.
1920년 12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커우에 이우민(李愚珉), 조중구(趙重九) 등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한커우에서 중국 측 인사들과 만나 한국 독립과 한중의 대일관계에 대한 논의를 나누고, 1921년 1월 8일 '중한국민호조단(中韓國民互助團)'을 결성하기 위한 주비회(籌備會)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1921년 1월 23일에 한중국민호조사(韓中國民互助社)을 결성하였다. 한국 측 인사로는 이기창(李基彰), 이우민, 조중구, 황영희(黃永熙) 등이 참가하였다.
한커우에서 한중호조사를 결성한 한국 측 요원들은 후난성[湖南省] 창사로 이동하였다. 3월 12일 창사에 도착한 이들은 중국 측 인사들과 접촉하여 한중호조사 결성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1921년 3월 14일에 창사 한중호조사가 결성되었다.
안후이에서도 3월 17일에 한중호조사가 결성되었다. 1921년 7월경에는 충칭에서 한중호조사가 결성되었다. 여기에는 이기창이 파견되어, 결성 과정을 주도하였다. 1921년 11월 13일에는 윈난에서도 황영희의 주도로 한중호조사가 결성되었다.
한편, 상하이에서는 임시정부의 주도로 다른 지역의 한중호조사를 총괄할 수 있는 총사(總社)를 결성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김규식(金奎植), 여운형(呂運亨), 이탁(李鐸), 한진교(韓鎭敎), 김철(金澈), 윤현진(尹顯振), 김문숙(金文淑), 김홍서(金弘敍), 서병호(徐丙浩), 이원익(李元益) 등이 주도하여 5월 28일에 한중호조사 총사가 결성되었다.
한중호조사는 지역 언론 등을 통한 항일선전 활동, 워싱턴 회의(The Washington Conference)에서 일본의 주장에 문제제기를 하는 등의 활동을 활발히 진행하였다. 한커우의 한중호조사는 지역 신문에 한국 문제를 보도하였고, 각 학교 등을 찾아가서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였다. 또한, 워싱턴 회의를 전후하여 중국의 각 단체들과 함께 국민대회를 개최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다른 지역의 한중호조사들도 이와 유사하게 지역 언론을 통한 선전과 연설 등의 활동을 하였다.
한중호조사는 1910년대 등장한 '신아주의(新亞主義)'에서 출발하여 공화주의 이념을 공유하는 가운데, 한중 양국의 항일연대 의식을 함양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한중호조사의 항일연대 의식은 1920년대 중반 한중실업협회(韓中實業協會), 한중민족협진회(韓中民族協進會) 등을 거쳐, 1930년대의 한중민족항일대동맹(韓中民族抗日大同盟), 1940년대의 한중문화협회(韓中文化協會)로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