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익은 일제강점기 임시의정원 외교위원회위원, 임시정부 서무국장, 인사국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이다. 1885년(고종 22)에 태어나 1963년에 사망했다. 1919년 의주에서 목사로 재직하던 중 3·1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의용군을 모집하여 경찰서를 습격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4월 김병조·장덕로 등과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여운형이 파리에 파견될 때, 한국시정진술서를 국제연맹 장로교만국연합총회 및 미주 각 교회에 보내 일제의 만행을 폭로했다. 독립운동 자금조달차 입국했다가 일본경찰에 잡혔다.
일명 원익(元翼). 평안북도 선천 출신. 1919년 평안북도 의주의 고령교회(古寧敎會) 목사로 재직하던 중 3 · 1운동을 주도하였다. 민족대표 33인 외 1인인 유여대(劉如大)를 비롯한 김병조(金秉祚) · 김승만(金承萬) · 장덕로(張德櫓) 등과 시위를 계획하였다.
먼저 50여 개 교회와 각 단체에 통고문을 비밀리에 전한 뒤 양실학원(養實學院)에서 회의하던 중, 3월 1일 서울의 시위소식이 전해지자 김창수(金昌洙) · 안석응(安碩鷹) 등과 함께 선언서를 군청 · 도청 · 경무국 · 헌병대에 전하고 시민에게 나눠 주었다.
유여대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뒤 2,000여 명과 함께 시위하던 중 일본경찰과 격돌하게 되자, 이를 피해 평안북도 구성군으로 가서 의용군을 모집하여 태천경찰서를 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4월 김병조 · 장덕로 등과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제2회 임시의정원 평안도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임시정부내에 설치된 임시사료편찬회(臨時史料編纂會)에 김병조 등과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대표 여운형(呂運亨)이 파리에 파견될 때, 목사 안승원(安承源)을 비롯한 장로 김시혁(金時赫) 등 11인과 함께 연서(連署)한 ‘한국시정진술서(韓國時情陳述書)’를 국제연맹 장로교만국연합총회 및 미주 각 교회에 보내어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였다.
그 밖에 국민대표회기성위원회(國民代表會期成委員會) 집행위원과 임시의정원 외교위원회위원 등을 맡았다. 같은 해 대한적십자회에 가입하여 자유대(自由隊) 대원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임시정부 서무국장을 지내고 한중국민호조사(韓中國民互助社)에서도 활동하였다.
1921년 조직된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의 서기가 되었으며, 1924년 임시정부 인사국장, 1925년 비준국장에 임명되어 활동하였으며, 독립운동 자금조달차 입국하였다가 일본경찰에 잡혔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