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1919년 3 · 1운동에서 민족 대표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
인적사항
주요 활동
1919년 2월 13일 평안북도 선천에서 양전백, 김병조, 이명룡과 함께 이승훈으로부터 서울의 천도교단이 독립운동을 제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동참을 약속하였다. 의주로 돌아와 양실학교 교사 정명채와 김두칠을 만나 의주에서도 독립운동을 벌일 것을 모의하였다.
2월 27일에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는 소식을 듣고 의주도 같은 날 독립선언식을 갖고자 본격적인 준비에 나섰다. 2월 28일 밤까지 서울에서 보내오기로 한 「기미독립선언서」가 도착하지 않자 「2 · 8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는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기미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지만, 그 자리에 가지 않고 의주의 만세 시위를 직접 지휘하였다. 오후 2시 30분 의주서교회 공터에 양실학교 학생 100명을 포함하여 800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때마침 서울에서 보낸 「3 · 1독립선언서」 200매가 도착해 낭독하였다. 독립선언식을 끝난 시위대는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날 헌병대에 체포되어 3월 7일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 검사국에서 취조를 받고,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경성지방법원에 기소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1월 16일 출옥하여 의주동교회 목사 자리로 돌아왔다. 1931년에 의주동교회 목사를 사임하고 신의주 백마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1934년에 병을 얻어 휴양 생활에 들어갔으나, 1937년 1월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영면하였다.
학문과 저술 · 사상과 작품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단행본
- 박찬승, 『대한민국의 첫 번째 봄』(다산초당, 2019)
논문
- 김승태, 「의주에서의 3 · 1운동과 유여대 목사」(『기독교사상』 715, 2018)
- 이용철, 「평안북도 의주지역의 3 · 1운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 61, 2018)
- 허동현, 「3 · 1운동에 미친 민족대표의 역할 재조명 -기독교계 대표 오희영과 유여대를 중심으로-」(『한국민족운동사연구』 46,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6)
기타 자료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27(국사편찬위원회, 1996)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2(국사편찬위원회, 1990)
주석
-
주1
: 죽은 뒤에 관등을 올리거나 훈장 따위를 줌. 우리나라의 경우 긴급 상황에서 살신성인의 정신을 실천하다가 사망하거나 위급한 상황에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여 사회 전체의 본받을 만한 모범이 된 사람, 생전에 큰 공을 세워 국민의 존경을 받으며 덕망을 갖춘 사람에게 준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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