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치는 조선 전기 성종~연산군 대 후릉참봉을 지낸 학자이다. 성리학 공부에 관심이 많았고, 연산군 대 나라가 혼란스럽고 어려워지자 상소를 통해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주변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중종반정 이후 관직에 나아갈 기회가 있었지만 사양하고,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홍치(洪治)는 1441년(세종 23)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여평(汝平), 호는 일송(一松)이다. 아버지는 영월군수 홍계관(洪桂官)이다. 아들은 성종 대에 무관으로 활동한 홍계호(洪繼浩)이다. 어려서부터 주변에서 학문적 자질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고, 성리학 공부에 매진하였다. 대제학을 역임한 안지(安止)에게 사사하여 의서(衣書)를 전수받았다. 부모의 장례를 당하여 주자가례(朱子家禮)의 법식을 준수하였다. 학문적 성과와 부모에 대한 효심, 효행 등이 주변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받았다. 이에 전라감사 박처륜(朴處倫)의 추천으로 후릉참봉(厚陵參奉)을 제수받았다.
연산군 대 국가가 혼란해지고 정치 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상소문을 올려 바로잡고자 하였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강하게 만류해 그만두었다. 나주에서 생활하다가 능주로 생활하는 곳을 옮겼다. 금오산 아래 뜰에 소나무를 심고 정사를 지어 ‘일송정사(一松精舍)’라 이름 붙였다.
중종반정 이후 관직에 나아갈 기회가 있었지만, 결국 응하지 않고 유명한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생활하였다. 홍치와 교유했던 유명한 인물 중에는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장형(杖刑)을 받다가 죽은 최보(崔溥)와 기묘명현(己卯名賢) 중 한 명인 이목(李穆) 등이 있다.
저술로는 『 심학장구집주대전(心學章句集註大全』 상편 · 하편이 있다. 지금도 홍치가 머무르면서 생활하였던 일송정이 전라남도 화순에 보존되어 있다. 다만, 홍치에 관한 기록이 매우 제한되어 있고, 『심학장구집주대전』은 신뢰성에 대한 논란이 있다. 후속 연구를 통해 관련 내용을 명확하게 규명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