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책. 채색지도가 첨부된 필사본. 책끝에 편찬자인 황주군수 김완수(金完秀)의 이름이 있다.
내용 구성은 진관(鎭管)·방리(坊里)·도로(道路)·건치연혁(建置沿革)·군명(郡名)·형승(形勝)·성지(城池)·관직(官職)·산천(山川)·물산(物産)·풍속(風俗)·단묘(壇廟)·공해(公廨)·누정(樓亭)·창고(倉庫)·제언(堤堰)·교량(橋梁)·역원(驛院)·관애(關阨)·봉수(烽燧)·사찰(寺刹)·고적(古蹟)·진보(鎭堡)·인물(人物:孝子·節婦·烈女 포함)·한전(旱田)·수전(水田)·진공(進貢)·조적(糶糴)·전세(田稅)·대동(大同)·균역(均役)·봉름(俸廩)·객사(客舍)·호총(戶摠) 등으로 되어 있다.
이 읍지는 1871년(고종 8)에 작성된 ≪해서읍지 海西邑誌≫ 제5책에 있는 황주목읍지 중 사례 부분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내용을 전사한 것이다. 따라서, 이 읍지에는 1895∼1896년 지방 제도 개혁 이후의 황주 지역 사정을 전하여주는 기록은 없다.
이 읍지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은 진관조 뒤에 경성(京城)·감영(監營)·수영(水營)과 황해도내 각 군현까지의 거리, 기린역(麒麟驛)·금교역(金郊驛)·청단역(靑丹驛)까지의 거리, 의주부·동래부 및 팔도 관찰사영까지의 거리, 마지막으로 중국 북경(北京)까지의 거리 등이 기록되어 있는 점이다.
황주는 해주와 더불어 황해도의 중심지역이며, 중국과 내왕하는 육상 교통로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미 1870년대에 지리적인 시야를 도(道) 전체와 전국으로, 나아가 인접 국가에까지 확대시키고 있음을 살필 수 있는 희귀한 읍지 기록이다.
또, 단묘조에 수록된 극성여단(棘城厲壇)에 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부터 보이는 내용인 황주가 북쪽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요지에 있음을 잘 드러내준다. 여단이 설치된 극성지역은 특히 고려 때 계속 병화를 겪어 사람의 뼈가 들에 널려 있을 정도여서 날씨가 음울한 때는 귀물(鬼物)들이 출몰하고 퍼져나가기 때문에 황해도 주민들이 많이 요절하였다.
그래서 국가에서 매년 봄·가을에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지내게 하였고, 조선 문종 때에는 그 요기(妖氣)가 경기도까지 미치므로 왕이 이를 걱정하여 친히 제문을 짓고 예관을 파견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이밖에도 ≪황주읍지≫ 2종이 규장각도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