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가사 ()

고전시가
작품
조선 영조 때 배이탁(裵爾度)이 지은 장편가사.
이칭
이칭
훈가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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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영조 때 배이탁(裵爾度)이 지은 장편가사.
구성 및 형식

국한문 혼용 필사본. ‘훈가이담(訓家俚談)’이라고도 한다. 작자는 경상북도 예천 사람인데 몰락한 양반의 후예로 시골 작청(作廳)의 일개 무속(武屬)인 첨정(僉正)이었다. 그러나 동료·후배들에게 문무겸전(文武兼全)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글도 좋아하였고, 근면하고 곧고 인후한 성품이었다. 그가 만년에 가난으로 인하여 예천을 떴을 때 동네사람들이 연명으로 소지(所志)를 올려 향청(鄕廳)에서 전령을 보내 다시 되돌아오게 하였으며, 각 촌 무인들이 돈을 거두어 6칸 초옥을 장만하여 주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형식은 4음보 1행을 기준으로 모두 355행이다. 내용은 자손들에 대한 훈계의 글로 삼강오륜의 인류의 도, 바르고 착하게 사는 처신의 도 및 농업에 힘써 가계를 윤택하게 하는 근면의 도 등으로 되어 있다.

내용

구체적인 조목은 다음과 같다.

조손(祖孫)(25행)·부자(父子)(49행)·신민(臣民)(26행)·부부(夫婦)(32행)·형제(兄弟)(35행)·붕우(朋友)(30행)·순천성무화목(順天性務和睦)(14행)·정기심결기행(正其心潔其行)(23행)·수천명수기분(守天命隨其分)(13행)·인인과신오신(忍人過愼吾身)(16행)·물해인구환란(勿害人救患亂)(18행)·근시서윤기신(勤詩書潤其身)(26행)·조기심태기한(操其心兌飢寒)(18행)·무농상윤기옥(務農桑潤其屋)(24행)·자탄(自嘆)(6행) 등의 15조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탄(自嘆)」이라는 조목의 후기를 겸하고 있다.

이 가사 뒤에는 군수·현감, 기타 고을 유지들의 후기를 실었는데, 그 첫머리에 홍대용(洪大容)이 당시 영천군수로서 쓴 후기가 있어 이 작품의 연대측정의 이정표가 된다. 그 후기의 내용 중, 당시 이 「훈가사」가 “읍인(邑人)들 사이에 낭송되는 것이 끊이지 아니하였다.”라는 것이 있다.

의의와 평가

이 작품은 그 제목에서 나타나듯이 내용이 처음부터 끝까지 수신교과서같이 훈계 일변도의 가사이므로 문학적 가치는 별로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무인으로서 많은 가사를 남긴 박인로는 임진왜란 때 의병 출신이었지만 배이탁은 시골 관청의 하급 무인으로서 가사를 지었다는 데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본인 자신이 「훈가사」라 하지 않고 「훈가이담」이라 낮추었지만, 홍대용과 같은 석학을 비롯하여 당시의 양반들이 다투어 후기를 썼고, 그의 유임을 청원하는 55명의 소지에 「훈가사」의 작자라고 크게 내세웠다.

그 밖에 「훈가사」의 국문학사적인 또 하나의 의미는 그 시대성으로 ‘내방가사’ 연대의 상한선이 정조대를 소급하지 못한다는 기존의 학설을 뒷받침해준다는 사실로 조선시대 ‘남성가사’에서 ‘여성가사’가 파생되는 과정의 시점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훈가사」(김용숙, 『청파문학』10, 숙명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회,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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