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준수는 해방 이후 조선인민유격대 제3병단 부사령관을 역임한 군인이다. 남도부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주오대학 법학부 수학 중 태평양 전쟁 학병으로 징집되자, 이를 거부하고 귀국하여 지리산에 숨었다. 1945년 3월, 지리산에서 항일 결사단체인 보광당을 결성했다. 조선인민유격대에 가담하여 제3병단 부사령관을 맡기도 하였다. 하준수는 미군정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빨치산 게릴라 활동을 벌였다. 6·25전쟁 중에는 태백산과 일월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였다. 1954년에 부하의 밀고로 체포, 1955년에 총살되었다.
1921년에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출생하였다. 진주고등학교의 전신인 진주중학교를 다니다 일본인 교사를 폭행하여 퇴학당한 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주오대학(中央大学) 법학부 수학 중 태평양 전쟁 학병으로 징집되자, 이를 거부하고 귀국하여 지리산에 숨어들었다.
남도부는 1945년 3월, 지리산 근처 괘관산(掛冠山)에서 동지 70여 명을 모아 항일 결사단체인 보광당(普光黨)을 결성하였으며, 일제가 패망하자 ‘조선건군준비위원회’를 설치하기도 하였으나, 이 단체는 1946년 1월에 미군정에 의해 해산되었다.
남도부는 여운형 주도의 조선인민당에 참여하여 함양군당 위원장을 맡은 바 있다. 그는 미군정 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빨치산 게릴라 활동을 벌였으며, 인민유격대에 가담하여 제3병단 부사령관을 맡기도 하였다. 6·25전쟁 중에는 태백산과 일월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였으나, 휴전 후 1954년에 부하의 밀고로 체포되어, 1955년에 총살되었다.
남도부의 본격적인 좌익 활동은 그가 일본 주오 대학 법학부에 다니던 중 태평양 전쟁 발발로 학도지원병제가 발표되고 학병으로 징집되자, 이를 피해 귀국하여 친구인 노동무와 함께 고향 근처인 지리산으로 숨어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먼저 1945년 3월에 지리산 인근의 괘관산에 은거하며 동지 73명을 모아 보광당(普光黨)이라는 항일 결사단체를 결성하였다. 당시 지리산에는 일제의 징용·징병을 거부한 청년들이 약 300명 가량 숨어 있었다고 한다. 보광당은 일제의 전쟁수행을 방해하고, 장차 연합군이 조선에 상륙하는 경우 이에 호응할 수 있도록 군사훈련을 실시했으며, 무기를 입수하기 위해 인근의 경찰주재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보광당은 후에 공산주의 빨치산 활동을 펼칠 수 있는 근거지가 되었다. 그는 1945년 8월에 일제가 패망하자, 조선건군준비위원회를 설치하고 ‘새생활운동’을 펼치는 등 건국 활동에 뛰어들기도 하였으나, 이 단체는 1946년 1월에 미군정에 의해 해산되고 말았다.
남도부는 또한 여운형 주도의 조선인민당에 가담, 함양군당 위원장을 맡기도 하였으나, 이후 조선인민당과 공산당이 남로당으로 합당이 되자, 여기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미군정 하에서 경찰에 쫓기는 입장이 되어 지리산에 숨어들었으며, 미군정으로 인해 자주적인 민족국가 수립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빨치산 게릴라 활동을 벌였다.
1949년에 조선인민유격대가 창설되자, 제3병단 부사령관에 임명되어 사령관인 김달삼과 함께 태백산 일대의 유격대를 지휘하였다. 6·25전쟁 중에는 태백산과 일월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였으며, 휴전 후인 1954년에 부하의 밀고로 대구에서 체포되었고, 이듬해 여름에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전처 성혜림의 오빠 성일기는 2006년 9월 18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빨치산 활동을 바탕으로 한 소설 『북위 38도선』(전 2권, 교학사)의 출간을 즈음하여 진행된 인터뷰에서 “남도부 사령관은 처형당하면서 끝까지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외쳤다”고 말하고, “그가 외친 인민공화국은 지금의 북한과는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