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선(東文選)』에 의하면 909년 6월 26일 이후 에 팔각등루(八角燈樓)를 지었고 11월 4일 이곳에서 처음 법회를 열었다고 하므로,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는 이 사이에 쓰였을 개연성이 있다. 894년(진성왕 8년) 시무(時務) 10여 조를 올린 뒤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최치원은 관직을 그만두고 방랑하다가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은거했다. 이 사이에 중알찬(重閼粲) 이재(異才) 등 수창군 호족(豪族)의 청에 응해 지었다. 이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는 수창군(壽昌郡: 대구)의 호국성(護國城) 팔각등루(八角燈樓)에 계속 걸려 있었다고 한다.
총 133권의 목판·활자본인『동문선』의 권64, 기(記) 부분에 실려 있다.
서두에서는 908년(천우 5) 10월 이재가 국가의 경사를 빌고 전쟁의 화를 물리치기 위해 남령(南嶺)(대구분지 남쪽의 대덕산성)에 팔각등루를 세웠다고 밝혔다. 이 누가 위치한 성의 서쪽·동남방모퉁이·동쪽에는 못이 있고 남쪽에는 산이 있어 환경이 훌륭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나서 이 누(樓)를 세운 중알찬은 국가를 해치는 자들을 숙청하던 몸으로서 이곳을 택해 보(堡)를 쌓고 도성(都城)의 서쪽을 지켰으며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수없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동시에 불교에 뜻을 두고 수양했으니, 그는 집에 있는 대사(大士: 불·보살의 통칭)인 동시에 위대한 나라를 받드는 충신이라 했다. 그의 부인도 네 가지 덕을 충분히 갖추고 날마다 불경(佛經)을 읽었다고 한다.
용년(龍年: 기사년, 즉 909년), 양월(洋月: 미월 未月), 경신일(庚申日) 밤의 꿈에 이 성 남쪽에 있는 불산(佛山) 위에 7기의 미륵상(彌勒像)이 북쪽을 향해 섰고, 며칠 뒤의 꿈에서는 성 동편의 장산(獐山)에서 나한승(羅漢僧)이 털옷을 입고 구름 위에 앉았는데 이처도(伊處道: 목숨을 희생하여 불법(佛法)에 순교한 열사)가 이곳을 경유해 군사를 거느리고 올 때라 말했다고 한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난세(亂世)를 맞이해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 미혹한 무리를 깨우치게 하려면 법등(法燈)을 높이 달아 병화를 없애야 한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성의 경치 좋은 곳에 팔각등루를 세워 등불을 밝히고 외적으로부터 이 철옹성을 지켰다고 한다.
같은 해 11월 4일에 공산(公山: 팔공산), 동사(桐寺: 동화사)의 홍순대덕(弘順大德)을 맞이해 좌주(座主)로 삼고 법회를 장엄하게 열었다. 그리하여 이곳을 호국성(護國城)이라 칭했다고 한다.
최치원은 후삼국(後三國)의 성립으로 국운이 기울어 가는 속에서 신라의 6두품 지식인으로서 무력감과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재 등의 요구에 부응해 본 등루기를 지어 유교사상과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호국(護國)·우국(憂國) 사상을 고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