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구들은 아궁이에서의 취사와 구들을 통한 난방 기능을 겸하는 부분난방 방식의 구조물이다. 외줄고래라고도 한다. 일반적인 구들과는 달리 주거 공간 내부의 한쪽 바닥 면에만 1∼2줄의 고래를 설치하는 부분난방 방식이다. 대개 아궁이-연소부-연도부(구들)-연통부로 이루어져 있다. 아궁이와 고래의 진행 방향이 일치하는 ‘일(一)자’형과 아궁이와 만곡되거나 직각으로 꺾이는 ‘ㄱ자’형 또는 ‘T자’형 등이 있다. 고대 한민족의 생활공간과 거의 일치하는 주거양식으로 한반도 전역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중요한 고고학 자료이다.
일반적인 구들은 아궁이에서 굴뚝 사이의 방바닥에 여러 줄의 고래를 길게 설치하여 뜨거운 화기와 연기가 고래를 지나면서 고래 위에 덮여 있는 구들장을 뜨겁게 덥혀서 방바닥 전체를 난방하는 시설이다.
이에 비하여, 쪽구들은 주거 공간 내부의 한쪽 바닥 면에만 1∼2줄의 고래를 설치하는 부분난방 방식으로 아궁이에서의 취사와 구들을 통한 난방 기능을 겸할 수 있다. 대개 아궁이-연소부-연도부(구들)-연통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궁이와 고래의 진행 방향이 일치하는 ‘일(一)자’형과 아궁이와 만곡되거나 직각으로 꺾이는 ‘ㄱ자’형 또는 ‘T자’형 등이 있다.
한반도 전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쪽구들은 북옥저(北沃沮) 문화의 소산으로 알려진 두만강유역과 간도 및 연해주 남부 일대의 ‘단결(團結)-크로우노프카’ 문화의 ‘여(呂)자’형 또는 ‘철(凸)자’형, 방형계 수혈주거지에서 ‘일(一)자’형과 ‘ㄱ자’형 쪽구들이 보편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래서 이들 지역으로부터 고구려와 한강유역에 쪽구들 문화가 전해져, 이후 중서부와 서남부 지역으로 전파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기존에는 쪽구들이 고구려에서 발원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오녀산성(烏女山城) 등의 발굴 결과, 고구려 중기인 4세기 말∼5세기 초가 되어서야 쪽구들이 나타날 뿐만 아니라, 초기 고구려의 중심지인 환인이나 집안지역에서는 쪽구들이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그 외곽지대에서만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쪽구들이 북옥저로부터 고구려로 전해진 것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고구려에서는 쪽구들이 거의 모든 수혈주거지와 건물에 설치되어 있어 일찍부터 쪽구들에 의한 난방시설이 발전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구당서』에는 “고구려 사람들은 겨울철에는 구덩이를 길게 파서 그 밑에다 숯불을 지펴 방을 따뜻하게 했다”는 기록과 같이 쪽구들이 고구려의 보편적 난방시설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실제 무순 고이산성(高爾山城), 심양 석대자산성(石台子山城), 환인 오녀산성, 집안 동대자 유적, 평양 안학궁지 · 정릉사지, 한강 유역의 고구려 보루성 유적 등 궁전지, 생활유적, 제사시설(사당) 등에서 ‘일(一)자’형과 ‘ㄱ자’형이 함께 확인되고 있어 두 가지 형식의 쪽구들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고구려의 궁전지인 안학궁과 국가 제사시설인 동대자 유적, 국가적 원찰인 정릉사지 등 최고 위계의 건축지에는 모두 ‘ㄱ자’형 쪽구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것은 열효율이 높고 복잡한 구조를 가지는 ‘ㄱ자’형 쪽구들이 발전된 형태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동대자 유적의 쪽구들과 아차산성 4보루, 구의동 보루 유적 등의 쪽구들에는 아궁이에 쇠솥을 설치한 경우도 있어 난방뿐 아니라 취사도 겸하였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한편 발해의 상경성(上京城), 팔련성(八連城) 등의 궁전지와 관청 건물 및 수혈주거지 내부에서도 고구려와 같은 형태의 쪽구들이 보편적으로 확인되고 있어 고구려 난방시설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중부의 한강유역에서 확인되는 ‘일(一)자’형 쪽구들은 포천 자작리, 파주 주월리 유적 등 대개 중부지역 원삼국시대의 대형 ‘여(呂)자’형 또는 방형계 수혈주거지의 출입구 반대쪽에 설치되는 것이 보편적인데, 이후 이 지역 한성백제 초기의 육각형 수혈주거지에 계승된다. 또 서울 아차산성 4보루, 시루봉 · 구의동 유적 등 6세기 중엽의 고구려 보루성의 건물지에서도 보편적으로 확인된다.
‘ㄱ자’형 쪽구들은 하남 미사리, 수원 서둔동 유적, 이천 설성산성 등의 원삼국 또는 초기 백제 수혈주거지와 한강유역의 고구려 보루성 유적의 건물지에서 나타나는 방형계 수혈주거지나 지상건물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아궁이와 연소부, 연도부 일부가 주거지 · 건물의 단벽 쪽에 설치되고, 직각으로 굴절되어 연도부 장벽이 주거지의 장벽 쪽에 설치되는 형태로써 ‘일(一)자’형보다 발전된 형태라 할 수 있다.
중부 및 서남부 지역과는 대조적으로 신라 · 가야의 고지인 영남지역에서는 사천 늑도 유적 등 서기전 1세기부터 원형 또는 타원형의 수혈주거지에서 취사와 난방을 겸한 한 줄의 쪽구들이 확인된다. 이후 이러한 주거형태를 계승한 4∼5세기 가야의 원형 또는 타원형 수혈주거지에서도 같은 형태의 쪽구들이 확인된다.
주거지의 형태에 따라 자연히 쪽구들의 평면 형태도 모두 곡선의 호형(弧形) 일색이다. 다만 초기의 쪽구들이 판석과 점토로 조립한 것인데 비하여 늦은 시기의 것은 점토로만 만들어진 것이어서 그 변화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중부 · 서남부와 영남지역의 쪽구들은 그 출현 시기가 다를 뿐만 아니라 쪽구들이 채용된 주거지의 형태도 판이하게 다른 것이어서 그 계통을 달리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현재까지의 자료로는 영남지방이 중부지역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나타나고 있다.
‘T자’형은 연도부의 가운데 부분을 돌출시켜 연소부와 아궁이를 만든 형태로서 중앙의 연소부에서 양쪽의 연도부로 배연되는 구조이다. 하남 이성산성(二聖山城) 수혈주거지 등 통일신라시대 수혈주거지에서 주로 확인되고 있어 가장 늦은 형식의 쪽구들임을 알 수 있다. 그 이후 쪽구들은 점차 여러 줄의 고래가 방바닥 전체를 덥히는 일반적인 온돌시설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원삼국시대부터 중국 동북부 지역에서 한반도 전역에 걸쳐 나타나는 쪽구들은 고대 한민족의 생활공간과 거의 일치하여 한민족 고유의 전통적인 주거생활 양식의 하나였음을 통찰할 수 있다. 특히 최근 간도 및 연해주 남부 일대에서 쪽구들이 설치된 초기철기시대 수혈주거지들이 많이 확인되고 있어 북옥저 · 고구려와 중 · 남부 지역 쪽구들 문화의 원류와 교류관계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고고학 자료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