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1∼6첩에는 전라도 56개 고을 중 제주, 대정, 정의를 제외한 53개 고을의 지도가, 7첩에는 전라도전도와 전라좌도지도, 전라우도지도 등 3매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1∼6첩의 53개 고을지도는 1리 간격의 눈금선(方眼) 위에 지도를 그렸다. 눈금선 간격이 가장 좁은 것은 고을의 규모가 큰 순천(順天)으로서 3.2∼3.3mm 정도에 불과하고, 가장 넓은 것은 고을의 규모가 작은 운봉, 용안, 진산, 정읍, 함열, 화순, 흥덕 등으로서 9.5∼9.6mm 정도에 이른다. 1리 눈금선을 그어 지도를 제작한 이유는 거리와 방향을 정확하게 그리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눈금선 지도 중 가장 크고 자세하지만 고을마다 통일성이 부족하여 거리와 방향의 정확성은 꽤 떨어지는 편이다. 지도의 표현 방법은 일반적인 그림식 지도 계통과 유사하며, 고을마다 통일되어 있지는 않다.
지도첩의 정확한 편찬 연대가 적혀 있지 않은데, 호서지도(충청도)·해서지도(황해도)·영남지도(경상도)·영동지도(강원도 영동)·함경도전도(함경도) 등 ‘비변사(備邊司)’의 인장이 찍혀 있는 대축척 고을지도첩과 함께 1750년 안팎에 편찬된 것으로 연구되었다. 모든 고을 지도에 1리 눈금선이 그려져 있어 중앙에서 모든 고을에 정확한 지도를 그려 올리라는 지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국가에서 확보한 고을지도는 1720년 안팎에 제작된 그림식 고을지도책(또는 첩) 계통으로, 강조하고 싶은 정보를 확대, 과장하여 그렸기 때문에 거리와 방향의 정확성은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 이에 거리와 방향이 정확한 고을지도를 확보하겠다는 국가의 의지가 반영되어 그려진 고을지도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지도첩이라 할 수 있다.
고을의 면적에서 상당한 편차가 있지만 1-6첩 지도의 크기는 세로×가로 103×80cm 정도로 거의 동일하게 그렸다. 이로 인해 1리 눈금선의 간격이 고을마다 다르게 되어 축척의 측면에서 지도의 통일성이 부족하게 되었다. 7첩에 있는 지도의 크기는 전라도전도가 131×117cm, 좌도와 우도 지도의 경우는 131×105cm 정도이다. ‘비변사(備邊司)’의 인장이 1첩의 나주, 3첩의 무주부, 6책의 광주, 7책의 전라도전도 뒷부분에 찍혀 있어 비변사에서 소장하며 사용한 지도임을 알 수 있으며, 이 때문에 일반적으로 ‘비변사인 방안지도(備邊司印 方眼地圖)’로 명명되고 있다.
1·2·5첩의 고을지도에는 정확하고 자세한 고을지도를 확보하겠다는 국가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지만 거리와 방향의 정확성에서는 수준이 높은 편이 아니다. 조선에서 확보한 거리 정보는 대부분 산 넘고 물 건너 구불구불 실제로 가는 길 위의 거리 정보이기 때문에 이를 평면의 직선 정보로 전환할 수 있는 전문 과정이 전제되어야 정확한 지도가 제작될 수 있다. 결국 정확한 지도의 제작은 수없이 많은 거리와 방향 정보를 비교·검토하면서 지도 위에 옮겨본 전문적 경험이 있어야 가능한 일인데, 고을에는 이런 전문가가 존재하기 어렵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고을지도를 제작하려는 국가의 의지가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되었다.
고을에서 직접 그려서 올려 보낸 대축척 지도이기 때문에 몇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기존의 지리지나 지도에 없는 새로운 정보가 많이 첨가되었다. 둘째, 비록 정확성의 수준이 아주 높지는 않지만 그림식 지도에 비해 거리와 방향의 대략적인 흐름을 잘 반영하여 그렸다. 이와 같은 장점 때문에 모두 이으면 남북 약 2.5m에 이르는 정상기(鄭尙驥)의 대형 지도를 1769년 안팎에 2차례에 걸쳐 더욱 자세하고 정확하게 그린 정철조(鄭喆祚)와, 1770년영조의 명을 받아 모두 연결하면 남북 약 6m에 이르는 초대형 고을지도, 도별도, 전국지도를 그린 신경준(申景濬)이 지도를 제작할 때 이 지도첩 계통을 중요한 참고 자료 중의 하나로 이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