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5월, 봉세관(捧稅官)의 과도한 조세수탈[稅弊], 일부 천주교 신자들의 토속신앙물 파괴[敎弊] 등이 그 배경이 되고, 대정군 상무사(商務社)와 신자들의 충돌을 그 직접적 계기로 하여, 제주도에서 이재수를 우두머리로 하는 민란이 발생하였다. 5월 28일 민군이 제주읍성을 점령하고 그곳에 피신한 천주교 신자들을 학살하면서 약 300~350명의 신자가 희생되었고, 뒤이어 출동한 조정의 진위대(鎭衛隊)가 민란을 진압하고 주동자를 압송해갔다. 이후 교회측이 수백명의 희생된 천주교 신자들의 시신을 묻을 땅을 요청하면서 정부측과 협상한 결과, 1903년 9월 14일 외부(外部)에서 제주목사에게 훈령을 내려 “황사평을 천주교인 매장 조계지로 확정하라”고 지시함으로써 1904년 희생자들의 유해가 황사평에 안장되고 장례식이 치러졌다.
1903년 제주본당의 라크루(Lacrouts, 具瑪瑟, 18711929, 마르첼리노) 신부가 홍종우(洪鍾宇, 1854?) 목사로부터 약 18,000평에 달하는 황사평(黃沙坪)을 양도 받았을 때에는 제주교안으로 희생된 천주교 신자의 시신만 매장하도록 했다. 1977년 9월 이래 황사평에서 매년 순교자 현양대회가 개최되어 신자들의 순교신심을 고취하게 되었고, 1980년대 초반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제주교구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황사평 묘역 성역화(聖域化)가 추진되었다. 이에 무명 순교자들의 묘역이 정비되고, 일반 신자들의 묘지분양 신청도 받게 되면서 1987년부터 본격적인 묘역 공원화 사업도 진행되었다. 1993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다시 황사평 묘역의 성역화를 재차 추진하여, 제주 교안의 희생자 김 토마스와 라크루 신부의 복사 신재순(申才淳, 아우구스티노)의 묘를 순교자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이어서 초창기 제주지목구장(濟州知牧區長)으로 활동한 헨리(Henry, 玄海, 19091976, 하롤드) 대주교를 비롯한 성 골롬반회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선교사, 1866년 경남 통영에서 순교한 김기량(金耆良, 펠릭스 베드로, 18161867), 저명한 성서학자 임승필 신부 등의 묘소도 이곳에 구역을 정해 안장됨으로써 성지로서의 면모가 한층 정비되었다.
1900년대 초, 제주도 선교과정에서 빚어진 천주교 신자들과 주민들 사이의 불행한 충돌로 희생된 수백명의 천주교 신자들의 공동묘지에서 출발한 황사평 성지는 차츰 성직자와 일반 신자들의 묘지도 들어서게 되고, 1977년 이래 이곳에서 매년 순교자 현양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오늘날 제주교구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신심(殉敎信心) 함양의 교육장소 겸 제주도내 순교자 현양의 거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