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릉 ()

고려시대사
유적
북한에 있는 고려 전기, 제10대 정종의 제1비인 용신왕후 한씨의 왕후릉.
유적/고인돌·고분·능묘
건립 시기
고려 전기
관련 국가
고려
관련 인물
용신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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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현릉은 북한에 있는 고려 전기 제10대 정종의 제1비인 용신왕후 한씨의 왕후릉이다. 용신왕후가 1036년(정종 2) 7월 경자일에 사망하자 그해 8월에 현릉에 장례를 지냈다. 능호는 공민왕의 현릉(玄陵)과 일치하지만 서로 다른 능이다. 현재 그 위치는 밝혀져 있지 않아 묘제나 무덤칸의 구조는 알 수 없다.

정의
북한에 있는 고려 전기, 제10대 정종의 제1비인 용신왕후 한씨의 왕후릉.
건립경위

용신왕후(容信王后)정종(靖宗)의 제1비로서 왕자 왕형(王詗)을 낳았다. 1036년(정종 2) 7월 경자일에 세상을 떠나자 정종이 왕실법도에 따라 8월에 장례를 치르고 능호를 현릉(玄陵)이라 하였다. 용신왕후의 현릉은 공민왕(恭愍王)의 능호인 현릉(玄陵)과 일치하지만 서로 다른 능이므로 구분해야 한다. 진전사원(眞殿寺院)은 기록에 전하지 않는다.

변천

『고려사』 위숙군(圍宿軍)조에 의하면 현릉은 산직장상(散職將相) 2명이 능을 수호하였던 것이 확인되어, 능침제도를 마련한 고려 왕실에서 제릉서(諸陵署)를 두어 왕릉뿐만 아니라 왕후릉도 관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무신란 이후 고려 후기부터 왕후릉에 대한 관리가 소홀해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여서 현릉의 위치를 알 수 없다.

형태와 특징

현릉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고 현존 여부도 확인되지 않아 묘제(墓制)나 무덤칸의 구조 등을 파악할 수 없다. 다만 고려시대에 왕후릉은 왕릉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였던 점을 상기한다면 남편인 제10대 정종의 주릉(周陵)이 2016년 개성특별시 해선리에서 발굴 조사되었기 때문에 그 주변에 위치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단행본

장경희, 『고려 왕릉』 (예맥, 2008)
장경희, 『고려왕릉(개정판)』 (예맥, 2013)
한재렴, 『고려고도징』 (아세아문화사, 1973)
황운룡, 『고려벌족에 관한 연구』 (친학사, 1978)

논문

김인호, 「고려시대 국왕의 장례절차와 특징」 (『한국중세사연구』 29, 한국중세사학회, 2010)
윤기엽, 「고려 혼전(魂殿)의 설치와 기능」 (『한국사상사학』 45, 한국사상사학회, 2013)
허흥식, 「고려의 왕릉과 사원과의 관계」 (『고려시대연구』 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0)
홍영의, 「조선시대 고려 왕릉의 현황과 보존 관리 실태: 여조왕릉등록을 중심으로」 (『한국중세고고학』 5, 한국중세고고학회,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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