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소련 블라디보스토크[海蔘威] 연해주 출생. 광복 후 입북하여 장편 서사시 「백두산」 등을 발표했다.
조기천은 1913년 소련 블라디보스토크[海蔘威] 연해주 ‘스파스크 촌’에서 출생했다. 1929년 ‘스파스크 촌’에서 초ㆍ중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 연해주 소왕령(지금의 우스리스크) 시 조선사범 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33년에 졸업했다.
1938년 7월에 시베리아 옴스크 고리끼사범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그해 9월 카자흐스탄 크슬오르다 시 소재 조선사범대학 문학부에서 세계문학사 강의를 2년간 맡았다. 대학 재직 중 유망한 교사로 인정받아 1939년 8월 모스크바 종합대학 대학원에 파견되기로 결정되어 모스크바로 갔으나, 조선인은 일본의 간첩이 될 수 있다는 혐의로 거절되어 되돌아왔다. 그후 대학 교직을 그만두고 고려인 신문 『레인기치』(후에 『고려일보』로 개칭)에서 문화부장으로 일하였다. 그는 조선사범대학에 재학 중이던 1930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되던 한글신문인 『선봉(先鋒)』에 시 「파리꼼무나」를 발표한 바 있다.
조기천은 1945년 8월 29일 소련진주군 제25군의 7부(군정치국)와 함께 평양에 들어왔다. 조기천은 같은 시기에 입북한 재소 조선인 전동혁, 림하 등과 함께 평양철도역 앞에 소련군 출판사를 차리고 1945년 9월 조선어 신문을 발간했다. 이 신문은 『조선신문』의 토대가 되었다.
조기천은 북한에서 「두만강」(1946.3), 「땅의 노래」(1946.6) 등을 발표하였고, 1947년 2월 장편 서사시 「백두산」을 창작했다. 「백두산」은 탈고와 동시에 당 기관지 『로동신문』에 10회에 걸쳐 연재되었으며, 조기천은 이 작품으로 제1회 북조선예술축전에서 1등상을 차지했다. 조기천은 예술축전에서 세 번이나 계속해서 수석 표창을 받았으며, 이러한 문학적 공로를 인정받아 1948년 공로메달을, 1951년 국가훈장 제2급을 받았다.
또한 한국전쟁 중에 「조선의 어머니」(1950), 「죽음을 원쑤에게」(1950), 「조선은 싸운다」(1951), 「우리는 조선 청년이다」(1951) 등 많은 전쟁시를 발표했다.
1951년 3월 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에 피선된 바 있으며, 그해 7월 31일, 미군기의 폭격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기천은 해방 직후 북한문단에서 “새로운 내용과 장르를 개철하고 이끈 향도자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장편 서사시 「백두산」은 북한문학에서 서사시를 유행하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하였으며, 항일혁명 문학의 원류”로 언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