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묘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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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을 궁궐의 우측에, 종묘를 좌측에 두는 고대의 도성 조영 원칙. 좌조우사.
이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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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조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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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사직단을 궁궐의 우측에, 종묘를 좌측에 두는 고대의 도성 조영 원칙. 좌조우사.
내용

고대 도성의 주요시설을 배치하는 원칙의 하나로 궁궐을 중심으로 주1주2에게 제사를 올리는 사직단은 그 우측 즉, 서쪽에 두고, 왕실의 사당에 해당하는 종묘는 그 좌측 즉, 동쪽에 배치하는 것을 가리킨다.

좌묘우사는 주3와 더불어 중국 고대 도시계획의 원칙을 언급하고 있는 중요한 문헌 가운데 하나인 『주례(周禮)』 주4에 나오는 내용이다. 고공기는 『주례』의 한 부분으로 『주례 고공기』, 『주례 동관 고공기』라고도 하는데 각종 관영 수공업 규범과 제조방법을 수록한 문헌이다. 이 책이 간행된 시점에 대해서는 학계의 논란이 있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주5 말기에서 주6 초기에 주요한 내용이 편찬된 것으로 보고 있다.

좌묘우사(좌조우사)는 “장인영국 방구리 방삼문(匠人營國 方九里 旁三門) 국중구경구위(國中九經九緯) 경도구궤(經涂九軌) 좌조우사 전조후시(左祖右社 前朝後市) 시조일부(市朝一夫)”라고 하는 문장의 일부로서 조정과 시장을 궁궐의 전후에 배치하라고 규정한 “전조후시”와 함께 국가의 존립을 상징하는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져야 할 위치를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언급하는 좌우는 통치자가 궁궐에서 남쪽 방향을 향해 섰을 때의 방향으로 방위로 보면 동쪽과 서쪽을 나타낸다.

좌묘우사는 역대의 도성에서 일관되게 지켜진 중요한 원칙으로 전조후시와 달리 우리나라에서도 엄격하게 준수되었다. 특히 도시 내 주요 시설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고려시대의 개경조선시대의 주7에서도 모두 이러한 원칙을 준수했다. 다만 중국 주8대의 도성 북경과 비교를 해 보면 중국은 궁성의 바로 앞쪽 좌우에 종묘와 사직단을 배치한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궁성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좌우에 배치하였고 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의의와 평가

좌묘우사를 포함한 『주례 고공기』의 도성계획 원리는 동아시아의 고대 도성을 주9할 때 널리 참고 되었던 것으로 우리나라에도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다. 현재 『주례 고공기』의 한글 번역본이 간행된 바 있으며 도시계획분야에서 이와 관련된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참고문헌

『중국도성제도의 이론)』(하업거 저, 윤정숙 역, 이회문화사, 1995)
『주례고공기(초)』(국토개발연구원, 1982)
「한·중·일 도성계획에서 주례·고공기의 해석과 적용에 관한 연구」(이영·한경호, 『대한건축학회지』27-3, 2011)
「주례고공기의 도시계획원리와 수당장안성의 구조」(최재영,『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35, 2010)
주석
주1

곡식을 맡아 다스린다는 신. 우리말샘

주2

음양가에서 말하는, 흙을 맡아 다스린다는 신. 우리말샘

주3

중국 춘추 시대의 제나라 재상인 관중(管仲)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책. 부민(富民), 치국(治國), 포교(布敎)를 서술하고 패도 정치를 역설하였다. 원본은 86편이었다고 하나 원나라 이후 76편이 남아 오늘날까지 전한다. 우리말샘

주4

중국 제나라 사람이 지은 공예 기술서. 중국의 고전 ≪주례≫ 가운데 한 편으로, 도성ㆍ궁전ㆍ관개(灌漑) 시설ㆍ무기ㆍ농기구ㆍ악기ㆍ병기 따위의 제작 기술에 관한 내용을 수록하였으며, 특히 차량 부문이 상세하다. 우리말샘

주5

중국 주나라가 동쪽으로 도읍을 옮긴 기원전 770년부터 기원전 403년까지 약 360년간의 전란 시대. 공자가 역사책인 ≪춘추≫에서 이 시대의 일을 서술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말샘

주6

중국 역사에서, 춘추 시대 다음의 기원전 403년부터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 약 200년간의 과도기. 여러 제후국이 패권을 다투었던 동란기로 ‘전국 칠웅’이라는 일곱 개의 제후국이 세력을 다투었으며, 제자백가와 같이 학문의 중흥기를 이루었고, 토지의 사유제와 함께 농사 기술의 발달 따위로 화폐가 유통되기도 하였다. 우리말샘

주7

‘서울’의 옛 이름. 우리말샘

주8

중국의 마지막 왕조(1616~1912).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후금국을 세우고, 그 아들 태종이 국호를 이것으로 고쳤으나 신해혁명으로 멸망하였다. 우리말샘

주9

집이나 건물을 지음. 우리말샘

집필자
한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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