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조선 전기의 문신 야계(倻溪) 송희규(宋希奎)가 사헌부 집의(執義)로 있으면서 명종의 외삼촌인 영의정 윤원형(尹元衡)과 이기(李芑)를 탄핵하다가 귀양살이를 하고 돌아와 1561년(명종 16)에 지은 제택(第宅)이다.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면에 일각 대문을 두고, 주위에 담장을 둘렀는데, 그 안의 다소 높은 기단 위에 백세각이 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 좌측에는 사당이 있으며 백세각 앞쪽 우측에는 관리사가 위치한다.
정침의 평면은 정면 7칸, 측면 6칸의 口자형이다. 정면 7칸 중 북쪽에서부터 헛방, 마구칸이 1칸씩 놓이고, 그 다음이 중문칸이다. 중문칸 남쪽으로는 사랑방 2칸과 사랑대청 2칸을 두었다. 사랑방과 대청 앞쪽에는 툇마루가 놓여 있는데 사랑방 앞 쌍여닫이 세살창문에는 가운데 설주가 서 있다.
안채는 3칸의 안대청을 중심으로 남측에는 건넌방과 마루방, 안사랑방과 부엌이 앞채에 이어졌고, 북측에는 안방과 부엌, 뒤주 등이 앞채의 마구간으로 이어진다. 안방과 안사랑방, 안대청 뒷벽의 창문에도 가운데 설주가 서 있다.
기단은 네모나게 잘 다듬은 돌을 4겹으로 쌓아 놓았고 자연석 초석을 놓아 각주를 세운 집이다. 사랑마루와 안대청 상부가구는 3량가에 제형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얹은 간소한 구조이며, 홑처마에 맞배집이다.
이 건물에는 이율곡(李栗谷), 한석봉(韓石峰), 채번암(蔡樊岩)의 친필이 각각 한 점씩 소장되어 있었으나, 한석봉의 친필은 1970년에 도난당하였다.
1919년 3ㆍ1운동 당시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을 위시한 문인들이 배포한 독립청원장서 3,000장을 복사한 곳이라고 전하며, 또한 경북 유림단 파리장서 사건의 모의 장소로 사용되어 3ㆍ1독립운동과도 관련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