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비 부여씨 묘지명은 백제 의자왕의 증손녀인 부여씨(扶餘氏, 690∼738)의 생애를 기록한 묘지명이다. 백제 멸망 후 당으로 끌려간 의자왕과 그 후손들의 행적을 살필 수 있는 금석문이다. 묘비명에 의하면 태비 부여씨는 의자왕의 손자인 부여덕장(扶餘德璋)의 장녀로 태어났다. 당의 황족인 사괵왕 이옹의 두 번째 부인이 되어 사괵왕비(嗣?王妃)로 책봉되었다가 그의 아들 이거가 사괵왕이 되자 태비(太妃)로 책봉되었다. 태자 부여융의 자손들의 가계를 복원하고 실제 당에서 어떤 대우를 받으며 살았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태비 부여씨 묘지명(太妃扶餘氏墓誌銘)은 2004년 봄 중국 섬서성 고고연구원에서 실시한 당(唐)고조(高祖) 이연(李淵)의 무덤인 헌릉(獻陵)의 딸린무덤[陪塚]을 발굴하다가 발견되었다. 묘지명이 출토된 곳은 섬서성 부평현 두촌진 여촌향이다. 무덤 양식은 태비 부여씨와 그의 남편인 당 사괵왕(嗣虢王) 이옹(李邕)의 어울무덤[合葬墓]이다. 무덤은 도굴의 피해를 입었으나, 이옹과 태비 부여씨 묘지명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다만 태비 부여씨 묘지명은 여러 조각으로 파손된 상태였다.
묘지명은 청석(靑石)으로 만들어졌고, 뚜껑돌[蓋石]과 지석(誌石)이 모두 남아 있다. 뚜껑돌의 크기는 가로 74㎝, 세로 70㎝, 두께 13㎝이고, 지석의 크기는 가로 74㎝, 세로 70㎝, 두께 9㎝이다. 뚜껑돌의 윗면에는 가로 48㎝, 세로 42㎝의 평면을 마련하고, 고박(古朴)한 풍격의 전서(篆書)로 행당 3자씩 3행에 걸쳐「당고괵왕비부여지명(唐故虢王妃扶餘誌銘)」이라고 9자를 새겨 넣어 묘지명의 주인을 밝혔다. 지석은 모두 30행에 걸쳐 해서(楷書)로 1행당 31자, 총 831자를 새겨넣었다.
묘지명의 글을 지은 사람은 양섭(梁涉)이다. 글씨를 쓴 사람은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위척(韋陟)으로 추정된다. 묘지명이 만들어진 때는 당 현종 개원 26년에 해당하는 738년 11월 15일이다.
태비 부여씨는 690년 백제 의자왕의 손자인 부여덕장(扶餘德璋)의 장녀로 태어났다. 711년에 당의 황족인 사괵왕 이옹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고, 718년에 사괵왕비(嗣虢王妃)로 책봉되었다. 731년에는 아들 이거(李巨)가 이옹의 뒤를 이어 사괵왕이 되자 태비(太妃)로 책봉되었다. 태비 부여씨는 이옹과의 사이에서 이거, 이승소(李承昭), 이승희(李承曦), 이승준(李承晙), 이승질(李承晊) 등 다섯 아들을 두었다.
738년 8월 9일에 장안(長安) 숭현방의 사저에서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그 해 11월 15일 이옹의 묘에 합장되었다. 부여씨의 일생은 묘지명에서 보여주듯이 백제의 왕족이자 이성제왕(異姓諸王)의 딸로서 숙녀(淑女)의 삶을 살았고, 사괵왕비 · 태비로서 영화로운 삶을 영위하였다.
태비 부여씨 묘지명의 기록을 통해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 후손들의 가계를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부여씨를 기준으로 의자왕이 증조부, 부여융(扶餘隆)이 조부, 부여덕장이 아버지가 된다. 지금까지는 의자왕의 아들로 당에 끌려간 태자 부여융, 왕자 부여태(扶餘泰) · 부여효(扶餘孝) · 부여연(扶餘演) 등과 부여융의 아들인 부여문사(扶餘文思)와 부여융의 증손인 부여경(扶餘敬) 등이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묘지명을 통해서 부여융의 아들로 부여덕장이 있었다는 사실이 새로 밝혀졌고, 추가로 부여문선(扶餘文宣)이 있었음이『구당서(舊唐書)』의 기록과 대조함으로써 드러났다. 그리하여 부여융의 아들로 부여문사 · 부여문선 · 부여덕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묘지명에 의하면 부여덕장에게는 태비 부여씨와 혹리(酷吏) 길온(吉溫)의 어머니가 되는 딸이 있었다. 또한 부여융의 뒤를 이어 대방군왕(帶方郡王)으로 책봉된 부여경이 부여문사의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태비 부여씨 묘지명은 백제 멸망 후 당으로 끌려간 의자왕과 그 후손들의 행적을 살필 수 있는 금석문이다. 또한 문헌 기록에 자세히 기록되지 않은 태자 부여융의 자손들의 가계를 복원하고, 실제 당에서 어떤 대우를 받으며 살았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백제유민사 연구 및 당의 복속민 정책의 일면을 살필 수 있어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