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암은 일제강점기 「알뜰한 당신」·「울며 헤진 부산항」·「꿈꾸는 백마강」 등을 쓴 작사가이자 극작가·연출가이다.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신시’ 부문에 「동방의 태양을 쏘라」, ‘유행가’ 부문에 「서울노래」가 당선되며 문단 및 연예계에 데뷔했다. 1941년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했다. 1930년대부터 1940년대에 오케 음반, 포리돌, 콜롬비아, 태평 음반 등에서 대중가요 작사가로 활동했다. 1940년대에는 일제의 군국가요와 친일극을 발표했다. 1948년 월북하여 북한 문화선전성 창작위원으로 활동하였고, 전쟁 중에는 종군작가로 활동했다.
충청남도 아산군에서 출생했고, 4세 때 부모와 함께 서울로 이주하여 서당 수준의 보통학교를 다녔다. 본명은 조영출(趙靈出)이다. 1922년 부친이 별세하자 모친과 함께 함경도 안변 석왕사에 의탁하여, 석왕사 보통학교를 다녔다. 1924년 건봉사로 출가하여 ‘중련’(重連)이란 법명을 받았다. 1930년 건봉사 장학생으로 서울의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32년 시 「님 오라 부르네」를 『신여성』에, 「밤」을 『조선일보』에 발표했고,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신시’ 부문에 「동방의 태양을 쏘라」, ‘유행가’ 부문에 「서울노래」가 가작 당선되며 문단 및 연예계에 데뷔했다. 1935년 보성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제2고등학원을 거쳐, 1938년 와세다대학 문학부(불문학 전공)에 입학, 1941년에 졸업했다.
그가 본격적인 대중가요 작사가로 활동하게 된 것은 OK레코드사의 이철 사장을 만나면서부터였다. 그는 오케 음반, 포리돌, 콜롬비아, 태평 음반 등에 조명암(趙鳴岩), 김운탄(金雲灘), 이가실(李嘉實), 김다인(金茶人) 등의 필명을 두루 사용했다. 1930년대부터 1940년대에 작사한 대표적인 대중가요는 「알뜰한 당신」, 「선창」, 「낙화유수」, 「서귀포 칠십리」, 「진주라 천리길」, 「고구려 애상곡」, 「울며 헤진 부산항」, 「어머님 전상서」, 「꿈꾸는 백마강」 등이 있다.
1940년대에는 일제의 전시 총동원령 정책에 발맞추어 군국가요와 친일극을 발표했다. 1941년에는 악극 「추석제」를 공연했고, 「아들의 혈서」, 「지원병의 어머니」 등 군국가요를 작사했다. 1945년에는 학도병 지원을 옹호하는 희곡 「현해탄」, 악극 「도화만리」, 「목련화」 등을 공연했다.
해방이 되자 좌익 진영인 조선연극건설본부 극작부 집행위원, 조선연극동맹 부위원장을 맡았고, 1946~1947년에는 각각 제1회, 제2회 ‘3·1기념 연극대회’ 참가작 「독립군」(나웅 연출), 「위대한 사랑」(안영일 연출)을 공연했다. 1948년 월북하여 북한 문화선전성 창작위원으로 활동하였고, 전쟁 중에는 종군작가로 활동하며 「어머니 우리 당이 바란다면」 등을 작사했다. 이후 작가동맹중앙위원(1956), 국립민족예술극장 총장(1957), 교육문화성 부상(1960), 예술총동맹중앙위원회 부위원장(1962) 등을 역임했다.
특히 1960년에는 작가, 작곡, 안무, 연출, 지휘, 무대미술 등 50여 명의 창조집단과 3천 명의 출연진이 만든 음악무용서사시 「영광스러운 우리 조국」 공연을 주도했고, 이 서사시는 집체창작 혁명가극의 모태가 되었다. 이후 「피바다」식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 「한 자위단의 운명」, 「밀림아 이야기하라」 등의 창작책임자로 활동했다. 또한 국립연극극장에서 「리순신장군」(1960), 가극 「해빛을 안고」(1968)을 공연하고, 1988년에는 「춘향전」을 평양예술단 공연작품으로 제작했다.
저서로는 북한에서 희곡집 『열두 삼천릿벌』(1956), 『조령출 시선집』(1957), 『조령출 희곡집』(1961), 시집 『밝은 태양 아래』(1988) 등을 출간했다.
북한에서 1982년 ‘김일성상 계관인’ 칭호와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