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철은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천안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1일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 병천리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만세시위를 주도한 아들 김구응의 순국을 일본 헌병들에게 항거하다가 총칼에 찔려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천안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김구응(金球應)의 어머니이다. 1853년 6월 26일 태어났고, 1919년 4월 1일 사망하였다.
1919년 4월 1일 전개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은 천안에서 일어난 3 · 1운동 중 가장 대표적인 독립만세운동이다.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은 이화학당에 다니던 유관순이 3월 5일의 남대문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독립선언서를 몰래 가지고 고향에 내려와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숙부 유중무(柳重武), 동네 어른인 조인원(趙仁元) 등에게 보이고 서울의 상황을 자세히 보고함으로써 시작되었다.
3월 28일부터 천안 입장면(笠場面), 천안면(天安面), 풍세면(豊歲面) 등에서 독립만세운동과 횃불 독립만세운동이 이어졌다. 특히 갈전면(葛田面)에서는 4월 1일 독립만세를 외치기 며칠 전부터 밤마다 병천 읍내를 중심으로 주위 고지(高地)에서 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부르는 횃불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갈전면에서는 조인원을 중심으로 김구응, 김상철(金相喆), 박종만 등이 함께 활동하였다. 수신면(修身面)에서는 홍일선(洪鎰善), 김교선(金敎善), 한동규(韓東奎), 이순구(李旬求), 성남면(城南面)에서는 이백하(李伯夏) 등이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결의하였다.
4월 1일 주도 인사들은 주민들과 함께 병천의 아우내 장터로 집합하였다. 오후 1시경 조인원 등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시장 군중 500~600명이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김교선, 김상철 등도 합류하여 3,000여 명의 군중들이 시장 일대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하였다.
병천 헌병주재소(憲兵駐在所)의 일본 헌병 5명은 장날을 맞아 아침부터 철저히 경계하였지만,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외치자 즉시 해산 명령을 내렸다. 군중들이 불응하고 계속하여 만세를 부르자 헌병들은 군중들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치는 기수(旗手)들을 향해 총칼을 휘두르고 군중들에게 발포하였다.
맨손으로 헌병의 총칼을 잡아 유혈이 낭자한 기수가 헌병에게 복부를 찔려 순국하자, 이를 힐책하는 김구응을 향해 발포하여 김구응도 순국하였고, 이어 김구응의 시신까지 훼손하였다. 최정철은 아들 김구응의 시신을 어루만지면서 혼도(昏倒)하고 헌병들을 크게 질책하다 일본 헌병의 총칼에 찔려 순국하였다.
이날 세 차례에 걸친 일본 헌병들의 무력 진압으로 6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