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은 민병숙(閔丙肅)이고, 아들은 민준기(閔駿基)이다.
1919년 4월 2일 강원도 홍천군 동면(東面) 속초리(束草里)에서 800명의 면민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홍천에서는 3월 말경부터 독립만세를 외치려는 논의가 있은 후, 4월 1일 홍천 읍내에서 천도교와 야소교(耶蘇敎) 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약 200명의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민씨(閔氏)의 집성촌(集姓村)인 성수리(城壽里)에서 고종의 국장 참례를 하고 귀가한 민병숙은 3월 말경에 형 민병태의 아들 민준기와 함께 독립만세를 준비하였다. 마을의 글방인 민두식(閔斗植)의 집에서 협의를 갖고, 면의 동쪽인 먹방산(墨房山) 너머 노천리(魯川里)와 좌운리(座雲里)를 제외한 면내 8개 마을에 통지하였다.
4월 2일 민병태는 성수리에서 동생 민병숙 등 민씨들, 주민들과 함께 마을 앞 들판 건너편인 속초리 면사무소로 갔다. 또한, 속초리의 허씨(許氏)들과 면내 각 주민들도 면사무소로 운집하였다. 오후 1시경 면사무소에 약 800명의 면민들이 집결하였다. 민병찬(閔丙讚)이 먼저 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들도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고창하며 호응하였다. 이어 면장 민병선(閔丙善)과 면서기들에게도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고 면사무소를 공격 파괴하였다.
한편, 일제는 4월 1일 정오에 홍천 읍내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홍천 헌병분견소(憲兵分遣所) 헌병들이 진압하였지만, 경계를 강화하기 위해 오후 2시에 춘천 주둔군 보병 제79연대 1개 분대를 홍천으로 급파하였다.
동면 면사무소에서 독립만세를 외친다는 급보를 받고 분견소 헌병 2명과 파견 보병 상등병 이하 4명을 홍천 읍내에서 6㎞ 넘게 떨어진 동면 면사무소로 출동시켰다. 도착한 헌병과 보병들의 해산 명령과 진압에 만세 군중들은 막대기를 휘두르고 돌을 던지며 항거하였다.
민병숙이 헌병 상등병 이케다[池田]의 병기(兵器)까지 탈취하려고 시도할 때, 옆에 있던 보병이 총격을 가하여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동생이 순국하고 자신도 어깨에 총을 맞는 부상을 당하였다. 이에 군중들도 맞서 격투를 벌여 헌병과 보병 각각 1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민병태는 부상 후에 오른팔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으나 절명하였다.
홍천군청은 면장과 면서기 등이 연락이 되지 않자, 군청 직원을 파견하여 면의 주요 서류를 군청으로 반출하고 면의 업무를 처리하도록 군직원 1명을 파견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