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서명운동 ()

현대사
사건
1986년에 신한민주당과 민주화추진협의회 주도로 전개된 대통령직선제 개헌 추진 운동.
이칭
이칭
1천만 개헌서명운동
사건/사회운동
발생 시기
1986년
종결 시기
1986년
관련 국가
대한민국
관련 단체
민주화추진협의회|신한민주당|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천주교회
관련 인물
김영삼|김대중|전두환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개헌서명운동(改憲署名運動)은 1986년에 신한민주당과 민주화추진협의회 주도로 전개된 대통령직선제 개헌 추진 운동이다. 1985년 2 · 12총선 승리로 제1야당이 된 신한민주당은 민주화추진협의회과 함께 1986년부터 1천만 개헌서명운동에 돌입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순차적으로 개헌추진위원회 결성대회 및 현판식이 진행되었고, 종교계와 지식인들의 공개서명 및 시국선언이 잇따랐다. 이에 정부와 여당도 한발 물러서 국회 개헌특위 설치에 합의하였지만, 여야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며 결국 1987년 4월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조치’가 나왔다.

정의
1986년에 신한민주당과 민주화추진협의회 주도로 전개된 대통령직선제 개헌 추진 운동.
배경

1983년 5월 18일 김영삼은 5 · 18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전두환 정권에 맞서 무기한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이를 계기로 김영삼계와 김대중계가 협력하여 1984년 5월 18일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하였다. 민주화추진협의회는 1985년 2 · 12총선을 앞두고 선명 야당의 기치를 내걸고 신한민주당을 창당하여 대통령직선제 개헌 공약을 앞세워 선거에 뛰어들었다.

2 · 12총선에서 승리함으로써 제1야당으로 급부상한 신한민주당은 1985년 9월 국회에서 개헌을 위한 특별위원회 설치를 공식으로 제안하였고, 그해 12월 김영삼과 김대중은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중심으로 ‘민주제 개헌 1천만 명 서명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1986년 1월 전두환은 88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가 우선이라며 개헌 논의를 1989년까지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경과 및 결과

이에 맞서 신한민주당은 민주화추진협의회와 함께 1986년 2월 12일 총선 1주년을 맞아 ‘1천만 개헌서명운동’에 전격 돌입하였다. 전두환 정부는 개헌서명운동과 관련한 모든 범법 행위에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 경고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개헌서명운동의 즉각 중지를 전제로 국회에서 개헌을 논의하자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신한민주당은 1986년 3월부터 각 지역별 개헌추진위원회 결성대회 및 현판식을 이어 나가며 개헌서명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먼저 3월 11일 서울에서 개헌추진위원회 서울시지부 결성대회 및 현판식을 가졌다. 3월 23일에는 부산, 3월 30일에는 광주, 4월 5일에는 대구, 4월 19일 대전, 4월 26일에는 청주에서 각각 같은 집회가 열렸다. 이와 같은 개헌서명운동 관련 집회가 열릴 때마다 신한민주당 당원들은 물론 일반 시민과 학생들까지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렸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가두시위를 벌이며 경찰과 충돌하기도 하였다.

신한민주당이 시작한 개헌서명운동은 종교계와 지식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3월 14일 차기 정권은 새 헌법에 의해 선출되어야 한다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한 후 3월 17일 1,050명, 4월 26일 2,748명의 목회자 서명 명단을 공개하였다. 천주교회도 3월 9일 김수환 추기경이 개헌은 빠를수록 좋다고 천명한 뒤, 4월 14일 명동성당에서 3,130명의 신도 서명 명단을 발표하였다.

지식인들의 경우 3월 28일 고려대학교 교수 28명이 개헌에 대한 요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하며 개헌은 국민 모두의 요구라는 내용의 시국선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4월 3일 한신대학교 교수 42명, 4월 11일 성균관대학교 교수 35명과 서울대학교 교수 48명 등 5월 15일까지 29개 대학 783명의 교수가 시국선언에 참여하였다. 또한 교수와 더불어 대학원생들의 시국선언도 각 대학에서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개헌서명운동이 큰 반향을 일으키자 1986년 4월 30일 전두환은 여야 3당 대표와 만나 1989년 이후 개헌 주장을 철회하고 여야가 국회에서 합의하여 헌법 개정안을 내놓으면 반대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따라 여야는 국회 내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개헌특위)를 구성할 것에 합의하였다.

반면 5월 3일 인천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개헌추진위원회 경기지부 결성대회 및 현판식이 행사에 참석한 민주화운동 진영과 학생운동 진영의 격렬한 시위 속에 유산되면서 신한민주당 주도의 개헌서명운동은 점차 힘을 잃었다.

이후 5월 10일 마산, 5월 31일 전주에서 같은 집회가 열렸지만 이전에 비해 그 열기는 약해졌다. 결국 신한민주당은 더 이상 장외 개헌서명운동을 벌이지 않고 국회 내에서 개헌특위 활동에 주력하였지만,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는 여당과의 개헌 협상은 난항을 거듭하였다. 결국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의 이른바 ' 호헌조치'로 개헌서명운동에서 촉발된 국회 개헌 협상은 파국으로 막을 내렸다.

의의 및 평가

개헌서명운동을 통해 고조된 대통령직선제 개헌에 대한 국민적 열망은 전두환 정권의 호헌조치에 맞서 6월항쟁으로 폭발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엮음, 『6월 민주항쟁: 전개와 의의』(한울, 2017)
서중석, 『6월항쟁』(돌베개, 2011)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 3』(돌베개,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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