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전 사회의 기초였던 농업, 농촌, 농민은 근대 이후 새로운 지식과 문물이 전파되면서 점차 계몽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의 경우 일본의 식민 지배 때부터 근대 지식과 문물을 먼저 접한 학생들이 농촌을 대상으로 한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해방 이후 분단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소강 상태를 보였던 학생들의 농촌활동은 1950년대 중반 전후(戰後) 복구 과정에서 재개되었다. 1950년대 말 여러 대학에서 학생들은 야학, 4-H클럽, 각종 농촌 연구 서클 등을 조직하여 ‘계몽’과 ‘봉사’를 중심으로 한 농촌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60년의 4·19는 대학생들의 사회 참여 의지를 급격하게 고양시켰다. 농촌활동 역시 학생운동의 주요 영역으로 활성화되었다. 1961년 5·16으로 학생 운동 전반이 위축된 가운데서도 군사 정부의 재건국민운동과 맞물려 대학생들의 농촌활동은 더욱 조직화되었다. 서울대학교에서는 1961년 6월 24일 각 단과대학의 농촌활동 관련 서클들이 연합하여 ‘서울대학교 향토개척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서울대학교 향토개척연합회’는 1961년 7월 19일 서울대학교 문리대 강당에서 학생 약 1,600명과 서울대 총장 및 교수들, 그리고 국민재건운동본부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서울대학교 향토개척단’을 공식 출범시키고, 본격적인 농촌활동으로서 향토개척단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서울대학교 향토개척단에는 사범대의 향토개발회와 경암농촌활동반, 수의대의 농촌연구회, 의대의 기독학생회 무의촌순례반, 법대의 농촌법학회, 상대의 농업경제학회, 치대‧간호학과의 TT클럽, 약대의 ‘소’모임, 문리대의 새생활운동대와 목민회, 문리대‧음대의 우리문화연구회, 미대의 농촌연구회, 공대의 향토공학회, 농대의 농촌연구회, 4H연구회, 덴마크연구회, 한얼모임, 잠업진흥활동, 농사단, 개척농사회, 서울대 YWCA 등이 참여했다.
서울대학교 향토개척단은 1961년 결성 직후 여름 방학 기간 동안 전국 200여 지구에 1,500여 명을 파견하여 농촌활동을 전개했다. 주요 활동 내용은 ① 농가 실태 조사 활동 ② 진료 봉사, 작업 봉사, 문화 및 위생 관련 봉사 활동 ③ 농촌 지도자 대상 계몽 활동 ④ 기술 지도, 국민가요 지도, 자치 및 부녀 관련 지도 활동 등이었다.
향토개척단운동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1962년에는 충청남도 보령군에서 협업 농장을 갖춘 농민 조직인 ‘덕양 향토개척단’의 설립과 활동을 지원하여, 1963년 총연장 350m, 간척면적 18정보 54,000평의 방조제를 완성하였다. 또한 서울대학교 향토개척단 주최로 1963년부터 1965년까지 매년 ‘향토의식초혼굿’이라는 문화 행사를 개최하여 탈춤, 무가, 농악과 같은 농촌에 기초한 민속 문화를 대학 문화의 일부로 끌어들였다.
1960년대 전반기까지만 해도 향토개척단운동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비교적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향토개척단운동 관련자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정부는 이 운동을 점차 경계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부터 향토개척단운동과 같은 대학생들의 농촌활동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본격화되었다. 1971년 학생 운동이 격화되자 정부는 위수령(衛戍令)을 내리고 학생 자치 활동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면서, 서울대학교 향토개척단이 간행하던 『향토개척』을 강제 폐간했다.
정부가 대학생들의 농촌활동에 대해 직접 통제에 나서면서 향토개척단운동은 점차 그 힘을 잃어갔다. 대신 학생들은 1970년대 중반부터 일명 ‘언더서클’이라고 불리는 비공개 학회를 중심으로 현장 활동 차원의 농촌활동을 시도했다. 농촌 ‘계몽’이나 농민을 위한 ‘봉사’ 차원을 넘어 민중의 삶의 ‘현장’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학생 운동 주체의 재생산을 도모한 새로운 농촌활동은, 1980년대 들어 학과와 학생회를 중심으로 더욱 대중화 · 제도화되었다. 반면, 한동안 명맥을 유지해 오던 향토개척단의 농촌활동, 즉 향토개척단운동은 1985년경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1961년부터 시작한 향토개척단운동에는 식민지 시기부터 이어 온 학생들의 농촌 계몽 운동 전통, 1950년대 비중이 컸던 농촌과 농민에 대한 학생들의 고민, 그리고 1960년 4·19로 고양된 사회 참여 의지와 민족주의 정서가 깊이 깔려 있었다. 특히 1961년 5·16 이후 군사 정부가 추진한 재건국민운동과 연결되면서 1960년대 전반기 학생 운동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단, 향토개척단운동은 군사 정부가 허용한 범위 내에서만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소박하고 낭만적이며 이상주의적인 성격이 강했다. 1960년대 중반 한일협정 반대운동 등에서 이러한 한계에 대한 극복 시도가 있었으나, 결국 1970년대 이후 정부의 강력한 탄압과 통제가 가해지자 향토개척단운동은 갈수록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향토개척단운동은 사라졌지만 대학생 농촌활동의 역량은 1970년대 중반부터 새로운 성격의 농촌활동, 즉 ‘농활’로 이어져 이후에도 오랫동안 대학생들의 삶과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