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한종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읍에서 일어난 3 · 1 만세시위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19일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읍 함안시장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대는 함안읍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함안경찰서와 주재소로 행진하였고, 함안군청 · 등기소 · 우편국 등을 습격하였으며, 일본 수비대의 무력 진압에 극력 저항하였다. 시위 참여 인사 색출 과정에서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하였다.
경상남도 함안군 출신으로 1867년 태어났다. 1920년 5월 11일 사망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7개 도시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고종 인산(因山)에 참여하기 위해서 서울에 갔다가 만세시위를 경험한 조한휘(趙漢輝)는 독립선언서를 숨겨 가지고 경상남도 함안으로 돌아왔다.
이후 조한휘는 이희석(李喜錫), 이찬영(李讚榮), 안지호(安知鎬)와 함께 3월 19일 함안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한종헌(韓鐘憲), 조한국(趙漢國), 김도권(金道權)은 만세시위에 사용할 태극기를 제작하였으며, 이희석은 독립선언서를 개작 · 축소해서 등사하였다.
3월 19일 정오, 비봉산(飛鳳山)에서 고천제(告天祭)를 지낸 이찬영의 신호에 따라 사람들이 함안읍 봉선동 일대로 모여들었고, 주동자들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오후 2시 이희석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으며, 주동자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주동자들은 태극기를 높이 들고 3,0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함안경찰서와 주재소로 행진하였다. 일본 군경이 만세시위의 해산을 종용하자, 격분한 시위대 1,000여 명은 도끼, 곤봉, 돌을 들고 주재소로 진입해서 문서를 뒤집어엎고 집기와 건물 일부를 파손하였다. 시위대 일부는 일본 경찰들을 주먹으로 구타하였으며, 경찰서장에게는 ‘독립만세공명(獨立萬勢共鳴)’의 증명서를 쓸 것을 요구하였다.
시위대는 함안군청으로 진입해서 군수 민인호(閔麟鎬)를 사로잡아 제복과 제모(制帽)를 벗긴 후, 함께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하였으며, 일부는 민인호를 구타하였다. 이후 시위대는 등기소 · 우편국 · 일본인 소학교를 습격하였으며, 전화선을 절단함으로써 일본 수비대의 진입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오후 5시 40분경 마산에 주둔하는 일본 수비대가 함안읍으로 출동해서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하였으며, 시위대는 극력 저항하였다. 시위대가 물러나자 일본 군경은 시위에 참여한 인사들을 색출하였다. 서한종(徐漢鍾)은 그 과정에서 체포되어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2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20년 5월 11일 순국하였다.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