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식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가납리 3 · 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가납리 3 · 1운동을 주도하였다. 3 · 1운동 소식을 듣고 이용화, 김진성과 함께 광적면의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준비하였다. 3월 28일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선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제 군경의 총격을 받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덕도리[디지털양주문화대전에는 효촌리] 출신으로, 1866년 3월 3일 태어났다. 1919년 3월 28일 사망하였다.
3 · 1운동 소식이 알려지자 백남식은 김진성(金辰成), 이용화(李龍和) 등과 함께 광적면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사발통문(沙鉢通文)을 돌려 마을 사람들에게 만세시위 계획을 전달하면서 시위 참여를 독려하였고, 일장기에 덧칠해서 만세시위에 사용할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3월 28일 오전부터 만세시위를 전개하고자 하였으나, 마을 민가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화재를 진압한 후, 효촌리 사람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면 소재지인 가납리로 행진하였다. 이들이 가납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광적면과 백석면에서 모인 사람들이 만세시위를 마친 직후였다.
시위를 마친 군중들이 다시 효천리 주민들과 합세하여 약 950여 명이 되었고, 오후 4시경에 논 가운데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재개하였다. 의정부에서 급파된 헌병대 5명과 헌병보조원 노호연(盧浩然), 그리고 광적면장 이하용(李河鎔) 등이 시위 주동자를 색출하려고 하자, 이용화는 태극기를 들고 시위대 앞으로 나가서 헌병대를 꾸짖으며 일제의 한국 침략을 규탄하였다.
이에 이하용이 도주하려고 하자, 시위대가 돌팔매질을 하면서 그를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일본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서 발포하였고, 시위대의 선두에 있던 백남식은 김진성, 이용화와 함께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일본 헌병대의 무력 진압으로 인해 시위대 4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2007년 10월 16일, 가납리 만세시위가 벌어졌던 만세배미[만세답]에 선열의 희생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양주 가래비 3 · 1운동 순국기념비’와 이용화, 김진성, 백남식의 흉상(胸像)을 건립하였다. 201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