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화는 일제강점기,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가납리 3 · 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양주군 광적면 가납리 3 · 1운동을 주도하였다. 3 · 1운동 소식을 듣고 백남식, 김진성과 함께 광적면의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준비하였다. 3월 28일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선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제 군경의 총격을 받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 출신으로, 1879년 12월 24일 태어났다. 자는 운경(雲京)이다. 1919년 3월 28일 광적면 만세시위에서 헌병의 발포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1919년 3 · 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광적면에서도 만세시위를 계획 · 준비하고 있었다. 이용화(李龍和)는 백남식(白南式), 김진성(金辰成) 등과 함께 사발통문(沙鉢通文)을 돌려 동지를 규합하였으며,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시위 계획을 알리고 일장기를 변형하여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28일 오전 9시경 효촌리에는 많은 군중이 집결하였는데, 갑자기 민가에 화재가 발생하여 시위가 지연되었다. 이에 오후 3시경 김진성, 백남식 등과 함께 마을 주민을 이끌고 10여 리[약 4㎞] 떨어진 광적면 가납리로 가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마침 가납리에서 벌어진 시위가 마무리 단계였고, 군중들은 대부분 귀가 중이었으나 효촌리 주민들을 만나 다시 시위대가 형성되었다.
그는 약 950명이나 되는 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급히 파견된 헌병들이 해산을 종용하였지만, 오히려 헌병들을 꾸짖고 돌팔매질을 하였다. 결국 헌병은 시위 군중을 향해 발포하였고 백남식, 김진성과 함께 그 자리에서 순국하였다.
2007년 10월 16일, 가납리 만세시위가 벌어졌던 만세배미[또는 만세답]에 선열의 희생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양주 가래비 3 · 1운동 순국기념비’와 이용화, 김진성, 백남식의 흉상을 건립하였다.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