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복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에서 일어난 3 · 1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1~2일 안성군 원곡면, 양성면 일대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4월 1일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 양성우편소, 일본인 고리대금업자의 집, 양성면사무소를 파괴하였고, 4월 2일 원곡면사무소를 방화하였다.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고, 수감 중에도 계속해서 만세를 부르다가 경찰이 발포한 총에 맞아 7월 4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출신으로, 1896년 1월 27일에 태어났고, 1919년 7월 4일 사망하였다.
1919년 4월 1일의 시위는 안성군 양성면과 원곡면에서 각각 전개되었다. 원곡면 칠곡리의 이유석(李裕奭) · 홍창섭(洪昌燮), 외가천리의 최은식(崔殷植) · 이희용(李熙龍) · 이근성(李根誠) · 이덕순(李德順) 등이 주도하여 원곡면사무소 앞에서 시위가 시작되었고, 이들이 양성면으로 행진할 때 시위 군중은 1,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가로지르는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 · 홍창섭 · 이덕순 등이 연설하였고, 이유복(李裕福)은 시위 군중과 함께 이에 적극 호응하였다.
같은 시간 양성면에서도 만세시위가 벌어져 시위대의 행진이 시작되었는데, 원곡면 시위대와 합세하여 2,000여 명이 되었다. 군중들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주재소로 향하였다.
밤 10시경 이유복은 시위 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들어가 집기류를 파괴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이어서 양성우편소로 몰려가 그곳의 기물을 파괴 · 방화하고, 일본인 고리대금업자 타카 히데토모[隆秀知]의 집을 파괴하였다. 다음으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괴한 후, 시위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하였다.
시위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4월 2일 새벽 4시경 다시 원곡면사무소에 가서 기물을 파괴하고 방화하였다. 이유복은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고, 옥중에서 다시 만세를 부르다가 경찰이 발포한 총에 맞아 1919년 7월 4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