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배는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일대에서 전개된 3 · 1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4일 강서군 반석면 일대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원장리 시장에서 시작된 시위는 전날 검거된 인사들을 구출하기 위해 헌병주재소로 향하다가 매복해 있던 일제 헌병의 총격에 맞서 헌병을 피살하였다. 다음날 관련자 검거 때 체포되어 12월 6일 고등법원에서 살인, 방화, 소요, 「보안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반육리(班六里) 출신으로, 1878년 10월 22일 태어났다. 3 · 1운동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다. 사망일은 전해지지 않는다.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上四里) 사천(沙川) 시위는 인접한 대동군 금제면(金祭面) 원장리(院場里) 시장에서 시작되었다. 인근 기독교인들은 1919년 3월 4일 원장리 시장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시위를 준비하였다.
거사 당일 오전 9시경 지석용(池錫湧)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본격적으로 시위가 시작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시위 군중은 급증하였다. 이때 반석교회(盤石敎會) 장로 최능현(崔能賢)과 사천시장교회(沙川市場敎會) 목사 송현근(宋賢根)이 전날 만세시위를 도모하였다가 검거된 사천시장교회 관련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사천 헌병 주재소로 갈 것을 주장하였다.
오후 1시경 원장리를 출발한 시위 군중들이 사천시장 근처에 도착하자, 매복해 있던 헌병들이 군중을 향해 총격을 가하였다. 이에 분노한 이준배(李俊培)는 군중과 함께 헌병을 공격해 사망케 하였고, 이후에도 계속 만세를 외치다가 해질 무렵 귀가하였다.
이튿날 새벽부터 사천, 원장, 반석 등 각 마을에 일본군 수비대가 들이닥쳐 주동자 및 관련자를 검거하였는데, 그도 이때 체포되었다. 모진 고문 끝에 1919년 12월 6일 고등법원에서 살인, 방화, 소요, 「보안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최종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고 가석방되었다. 사망일은 전해지지 않는다.
2007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