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계묵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사천군에서 일어난 3 · 1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경상남도 사천군에서 일어난 3 · 1운동에 참여하였다. 사천공립보통학교 만세시위를 주도한 학생들의 고문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4월 14일 사천 중서포 도로공사 인부들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었다. 일본 헌병의 가혹한 고문으로 그해 5월 부산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경상남도 사천군(泗川郡) 출신으로 1893년 태어났다. 1919년 5월 순국하였다. 중서포(中宣蒲) 도로공사에 참여한 노동자이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7개 도시에서 일제히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3월 18일 진주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던 황순주(黃順柱), 박기현(朴基玄), 김종철(金鍾喆)은 사천군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3월 21일 사천공립보통학교(泗川公立普通學校)의 졸업식이 끝나면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그런데 졸업식 직전에 축구를 하던 학생 이윤조(李允祚)가 태극기를 꺼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교장과 교직원들이 이윤조를 잡으려 하였고, 이를 목격한 학생들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일본 헌병은 만세시위를 진압하였으며, 만세시위를 주도한 학생들을 잔인하게 고문하였다.
일본 헌병이 학생들을 가혹하게 고문한 사실이 사천군 일대에 전해졌다. 이에 격분한 나머지 손계묵(孫桂默)은 4월 14일 중서포의 도로공사를 마치고 귀가하다가 유승갑(柳承甲)과 함께 도로공사에 참여한 인부 100여 명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인부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는 소리를 들은 인근 마을 사람들도 시위에 합세하였다.
수백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사천읍으로 행진하였으며, 이에 출동한 일본 헌병 10여 명은 시위대를 향해서 장검을 휘두르면서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손계묵은 일본 헌병에 의해서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일본 헌병에 의해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부산형무소에 이감되었다가 그해 5월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