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은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에서 전개된 3 · 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30일 영동군 학산면 서산리에서 일어난 3 · 1운동을 주도하였다. 만세시위를 준비하던 학생들이 학산면 주재소로 연행되면서 만세운동이 본격화되었고, 이낙연은 주재소 앞의 시위를 솔선하여 지휘하다가 체포되었다.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출신으로, 본관은 인천(仁川)이다. 1899년 1월 14일 출생하였고, 1919년 11월 8일 사망하였다. 이낙연(李洛然)이라고도 한다.
가곡리는 가지골, 갓골이라고도 불렸는데 인천 이씨(仁川李氏)가 세거해 온 마을로 3 · 1운동 당시에는 300호에 달하며 성세를 이루고 있었다.
1919년 3월 30일 영동군 학산면에서는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3 · 1운동의 소식을 듣고 이에 부응한 이채연(李彩然)에 의해 계획되었다. 이후 양산면 유곡리의 보통학교 학생 이흥연(李興然)과 이성주(李聖周)가 목판에 ‘대한독립만세’라는 문구를 크게 새겨 큰길가에 세워놓고 만세를 부르려던 차에 일경에게 발각되어 인근의 학산면 주재소로 연행되면서 본격화되었다.
분개한 수십 명의 주민들이 주재소로 달려가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마침 영동과 전북 무주(茂朱)를 연결하는 도로공사에 동원된 군중들도 합세하여 그 규모가 확대되었다. 흥분한 주민들은 주재소에 돌을 던져 창호(窓戶)와 전화뿐만 아니라 내부의 기물을 부수는 격렬한 시위로 체포된 학생들을 구출하였으며, 일본 경찰까지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게 만들었다.
이때 이낙연(李樂然)은 친형 이채연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채연, 이헌주(李憲周), 김광연(金光然), 이진국(李鎭國), 이상찬(李相瓚), 이봉연(李鳳然) 등과 함께 주재소 앞의 시위를 솔선하여 지휘하였으며, 영동과 대전에서 출동한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6월 13일 대전지방검사국 공주지청에서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2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7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또다시 상고하였으나 10월 13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어 복역하였다. 1919년 11월 8일 복역 중 순국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