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동은 일제강점기, 중국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자.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이후부터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정의부에서 이청천과 활동하였으며, 만주사변 이후 남자현과 함께 일본 고위 관료를 척살하는 활동을 하였다. 영신농업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사업을 하면서 조선독립촉진회를 조직하였다. 광복 이후 동북한국교민연합회 파견 대표단장으로 재만 동포의 신속한 귀국 대책을 요청하였고, 그들의 참상을 알리는 활동을 펼쳤다.
충청남도 보령 출신으로 1917년 중국 길림성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규동(李圭東)은 새로운 한인민단(韓人民團) 규칙을 제정하기로 하고, 이주 한인에 관한 재판 주 사무를 취급하기 위해 통화현(通化縣)에 그 본부를 두었다. 단장은 허란(許爛), 부단장 왕삼덕(王三德)이며, 이규동은 해령현(海寧縣) 지부를 담당하였다.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국내에서 일어나자 4월 남상복(南相福), 주종경(朱鐘敬) 등과 유하현 대사탄(大沙灘) 한인학교에서 독립선언서 축하회를 개최하고자 하였다. 대사탄 한인학교에서 독립선언 축하식을 거행하며 시위하여 일제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파악되었다. 그해 10월 이규동은 심양역에 폭탄을 투척하는 사건을 계획하였다.
1924년 만몽(滿蒙)지방기관 조직위원으로 마진(馬晉), 박관해(朴觀海) 등과 활동하였다. 이규동은 정의부(正義府) 창립 시부터 활동하였다.
1927년에는 길림성 반석현(磐石縣)에서 정의부 임원 개선 회의를 통해 중앙집행위원장 김동삼(金東三)을 위시하여 각 임원들이 선출되었다. 이규동은 중앙집행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28년 지청천(池靑天), 이종건(李鍾乾), 배선호(裵先鎬) 등과 함께 정의부 대표로서 신민부(新民府), 참의부(參議府)와의 삼부 통합과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 재만촉성회(在滿促成會) 조직동맹을 조직하였다.
1929년 정의부 중앙집행위원회 집행위원 겸 산업부장으로 선임되었다. 만주에 산재한 독립운동가 조직을 통합하여 명실상부한 단체로 거듭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규동은 만주사변(滿洲事變) 이후 1933년 남자현(南慈賢)과 함께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를 주살(誅殺)하기 위한 폭탄 운반에 협조하였으나, 남자현이 붙잡혀 실행되지 못하였다.
1938년 11월에는 이종대(李鍾岱)가 자작농 창설제로서 경영 중인 영신농장으로 이전하여 영신농업학교(永新農業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교육사업을 하면서 조선독립촉진회(朝鮮獨立促進會)를 조직하고 동지 규합 등으로 활동하였다. 광복 이후 동북한국민회연합회 파견 대표단장으로 미군정 당국에 재만 동포의 신속한 귀국 대책을 요청하였으며, 그들의 참상을 알리는 활동을 펼쳤다.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